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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어떻게 뻔뻔하게 대선판에 나온다고! 진보 다 말아먹고!"
아내의 호령은 추상같았습니다. 이정희 대선 출마선언 소식을 접한 아내는 "저렇게 됐으면 자숙하고 있어야지, 무슨!"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냥 마음이 착잡할 뿐이었습니다. 한때 나의 희망이었고, 대한민국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바로 그녀라고 믿었으며,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그녀가 내 아내에 의해 '자숙이 마땅한 대상'으로 딱 찍혀 버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것 자체도 참 이질적이었거니와, 누구보다 이정희라는 인물을 좋아했던 아내가 저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냥 몇년 자숙하다가 다시 나오면 모를까, 이번 선거에 나오겠다는거야?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저는 그저 속으로 '괴물'이란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네 진보의 역사, 그것은 일제시대의 잔존물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유하다가 미 군정의 대거 등용이라는 불법폐기 벤젠을 맞고 돌연변이가 된 괴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해 온갖 투쟁을 했지만, 그 거대한 부조리 앞에 서기만 하면 잡아먹혀 버리는 경험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괴물의 편이 되거나, 혹은 죽을 것을 알고서도 괴물과 계속 싸워왔습니다.
괴물과 싸우려면 우리에게도 괴물과 맞먹는 힘과 세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괴물의 약점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망령, 군사독재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버리며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선봉이 된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벌인 87년의 싸움에서 괴물의 사과를 받아내었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히드라처럼 괴물은 머리가 잘려도 다시 돋아나기에 그 생명의 끝을 알 수 없었던 괴물은 자기의 거대한 몸통은 숨겨놓고 그 이후 얼마간은 촉수만을 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민주정권이 탄생했을 때, 우리는 괴물이 없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었을 뿐, 실제로 괴물은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도, 그 괴물은 부활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으로 다시 괴물의 시대가 우리 눈 앞에서 도래했을 때, 예전 괴물과 싸웠던 사람들은 다시 뭉쳐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 돌아온 괴물은 전체주의의 망령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극치라는 새로운 무기까지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절망의 크기도 컸고, 아픔도 컸습니다.
이 괴물을 잡기 위해 반 괴물 세력들은 하나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나름대로 하나로 뭉쳐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깨닫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일관적으로 괴물과 싸우던 세력 중 일부가 니체의 경구대로 심연을 너무 들여다봤고, 그 심연이 그 자신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가 스스로 괴물이 된 것입니다.
원래 괴물이 뿜어댔던 '종북몰이의 독'이 강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괴물과 싸워왔던 타성 속에서 그들이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 원했던, 원치 않았던, 괴물과 맞서서 가장 열심히 싸워왔던 일부 세력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이 상황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불순물들이 계속해 아직 다 맑아지지 못한 뇌리를 떠돕니다. 나에겐 한 때 영웅이었던 이정희. 그녀의 지금 판단은 무엇일까요. 명분을 쌓아 놓는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만악의 근원의 세력인 친일파들과 단호하게 한 세력으로 뭉쳐 싸워야 할 이 시기에, 그 명분 때문에 대선에 나오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요. 아니면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세력'의 논리와 판단 때문에 그녀가 밀려 나온 것일까요.
내 마음 한 켠에서 늘 애잔함을 띠고 서 있는 여린 소녀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가도 아마조네스의 여전사처럼 단호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던, 희망의 상징이던 그녀가 이렇게 짠하기만 한 이유는 그것이 조직의 논리든 무엇이든 간에 그녀만의 선택이 아니었을거란 걸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와 그 세력들이 지금껏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친일매국노와 그들이 남겨 놓은 그 괴물 세력과 가장 첨예하게 싸워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런 행동이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 87년의 비극을 재연하게 만든다면, 여기에 조금이라도 일조를 한다면... 그것은 괴물과 싸우던 그들이 괴물이 되어, 저쪽 괴물들과 한통속이 되어 희망이 없어져 자포자기하는 국민들을 잡아먹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조직의 결정이 어쨌든간에, 이번엔 아닙니다. 내가 사랑했던 이정희... 그녀가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도 괴물이 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