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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끔 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그 때마다 나는 서슴없이‘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1953)라고 대답한다. 오스카 작품상을 탄 이 영화가 과연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시민 케인’이나 ‘버티고’ 같은 영화를 제치고 가장 우수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느냐는 데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내게 있어선 개인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최고의 작품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본 뒤로 영화가 내 삶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또 다른 영화들로는‘도쿄 스토리’를 비롯한 오주의 영화들과 ‘제3의 사나이’ 및 ‘짧은 만남’ 등이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영화에 대한 선호도란 다분히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어서 같은 영화를 놓고도 그에 대한 의견이 구구각색이다.
영국 영화학회가 발간하는 세계 최고의 영화잡지인 ‘사이트 & 사운드’는 지난 8월호에 역대 탑50 영화를 발표하면서 제1위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심리 스릴러 ‘버티고’(Vertigo·1958·사진)를 올렸다. 제2위는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잡지는 지난 1952년부터 시작해 매 10년 마다 역대 탑50 영화를 발표해 왔는데 ‘버티고’는 이번에 처음으로 제1위에 올랐다.
전 세계 846명의 비평가와 학자 및 영화 관계 업자 등을 상대로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버티고’가 지난 1962년 이래 반세기간 계속해 제1위 자리를 지켜온 ‘시민 케인’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올랐다는 점. 두 영화의 표 차이는 34표.그런데 묘하게도 두 영화의 음악을 모두 히치콕의 단골 작곡가 버나드 허만이 작곡했다.
한국에서는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광화문에 있던 아카데미 극장에서 개봉된 ‘버티고’ (현기라는 뜻)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히치콕의 영화로 한 남자의 금발미녀에 대한 집념을 그린 매우 우울한 영화다.
고지공포증자인 샌프란시스코의 은퇴형사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가 자기가 미행하는 금발미녀 매들렌(킴 노백)을 깊이 사랑해 그녀에게 집념하나 사실 매들렌은 타인으로 위장한 하나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스카티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매들렌이 수녀원 종탑에서 추락사한 뒤 매들렌으로 위장했던 주디(역시 킴 노박)를 만나 이 실존하는 여인을 존재하지 않았던 매들렌으로 변환시키려 하다가 주디도 매들렌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
스카티는 사랑하는 한 여자를 두 번이나 잃는다.매우 복잡하나 뛰어난 플롯을 지닌 기술적으로도 결점 없는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에 나온 금발 미녀들인 티피 헤드렌, 그레이스 켈리, 에바 마리 세인트 및 베라 마일스 등에 집념했던 히치콕의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되겠다.작달막한 키의 배불뚝이 뚱보로 부루퉁한 입술과 무거운 눈꺼풀 그리고 서양호박처럼 큰 머리를 지녔던 히치콕은 생전 금발 미녀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던 ‘사이코’였다.
그러나 자신에겐 이 금발미녀들이 화중지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히치콕은 영화에서 이 여자들을 죽여 버리거나 잔인하게 학대하며 화풀이를 했었다.‘사이트 & 사운드’의 탑50 조사에서 ‘버티고’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 1982년 으로 그 때 제7위에 올랐었다. 그 뒤로 이 영화는 꾸준히 상승해 이번에 제1위가 됐는데 히치콕의 또 다른 영화 ‘사이코’는 이번 조사에서 제35위를 차지했다.
나는 얼마 전 ‘버티고’를 다시 봤다.냉철한 기술적인 면이 예술성을 앞서 가다시피 하는 탁월한 영화로 절망적으로 로맨틱하다. 미로 같은 플롯과 허만의 귀기 서린 로맨틱한 음악과 함께 노박의 눈동자가 바람개비가 되어 돌아가는 오프닝 크레딧 장면을 비롯해 키스하는 스튜어트와 노백을 감싸 안고 회전하며 또 목표물을 향해 카메라가 급하게 줌하는 로버트 버크스의 촬영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한 영화라고 하겠다.
이번 조사에서 ‘버티고’와 ‘시민 케인’에이은 나머지 탑10은 다음과 같다.
3‘. 도쿄 스토리’ (Tokyo Story·1953) 야수지로 오주 감독.
4‘. 게임의 법칙’ (The Rules of the Game·1939) 장 르놔르.
5‘. 선라이즈: 두 인간의 노래’ (Sunrise: A Song of Two Humans·1927) F.W. 무르나우.
6‘. 2001: 우주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1968) 스탠리 큐브릭.
7‘. 수색자’ (The Searchers·1956) 존 포드.
8‘. 영화 카메라를 든 남자’ (Man with the Movie Camera·1929)지가 베르토프.
9‘. 잔 다크의 수난’ (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 칼 드라이어.
10‘. 8½’ (1963) 페데리코 펠리니.
한편 이 잡지가 봉준호와 우디 알렌 등 전세계 총 385명의 감독을 상대로 조사한 역대 탑10에서는 ‘도쿄 스토리’가 제1위를 그리고‘ 시민 케인’과‘ 2001: 우주 오디세이’가 공동 2위를 차지했다‘.
버티고’는 제7위에 머물렀다.
<박흥진/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LA영화비평가협, 헐리웃 외신기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