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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일 년 전인 1859년 10월 16일 일요일 밤,19명의 젊은 청년들이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따라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주의 접경지대인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를 향하여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가 부스럭거리는 밤,깊은 산 속의 오솔길을 어두움을 타고 가고 있는 이 젊은이들은 모두가 커다란 장방형의 숄을 어깨에서 발끝가지 길게 늘어뜨리고 그 속에는 긴 장총을 감추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는 곧 닥쳐오는 겨울을 알리는 듯 밤안개 속에 깊숙이 싸여있는 블루릿지 산맥(Blue Ridge Mountains)은 귀신이라도 나올 듯 으스스한 기분이다. 이 젊은이들 중에는 법관이 있는가 하면 농부, 도망자, 신앙심이 깊은 퀘이커 교도, 도망노예들이 있었다.이들은 노예제도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로 노예제도 타도를 위하여 나선 용감한 용사들이다. 노예해방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있던 것이다.
5명의 흑인과 14명의 백인으로 구성된 이 특공대는 “미합중국 임시 군대”(The Provisional Army of the United States)라는 명칭 하에 소위 괴상한 제도(Peculiar Institution)라 불리던 노예제도를 타도하려는 비밀공격을 시행하려는 것이다.이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한 임시군대의 총사령관인 존 브라운 (John Brown)은 당시 59세의 노인이었다. 번득이는 눈과 길게 늘어뜨린 하얀 수염으로 유명한 존 브라운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거사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아 미국을 전쟁으로 급속도로 몰고 간 이 사람은 1800년 5월 9일 코네티컷 주에서 오웬 브라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단순하고 검소하며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아이들을 깊은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키웠다고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그의 계율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끊임없는 교훈이었다.또 존은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라고 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한다.성격이 자유분방하여 학교를 싫어하던 존 브라운은 소년시절 제혁공장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일을 했다.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슬피 울며 어머니를 못 잊어 했는데 아버지가 재혼하여 새 엄마가 들어왔을 때도 계속하여 자기 어머니를 못 잊어했다고 한다. 1812년 멕시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미시간에 있는 군사기지에 식품을 납품했다. 당시 12세 소년이었던 존은 산 속에 들어가 야생의 소와 짐승들을 몰아 100 마일이나 되는 군 주둔지에 몰아다 주고 돈을 벌어왔다.
한번은 소몰이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아주 깨끗하고 좋은 하숙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 집에는 존 나이 또래의 흑인소년 노예가 있었는데 옷도 헐벗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주인이 생각나면 아무 때나 쇠뭉치건 막대기건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노예를 때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존은 아버지가 어째서 “노예제도는 죄”라고 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때부터 소년 존 브라운은 반노예 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는 “노예제도와의 영원한 전쟁” 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20세가 되던 해 존은 19세 처녀 다이앤 더스크와 결혼했다.그러나 그녀는 일곱 번째 아이를 해산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두 번째 부인 메어리 앤 데이를 맞아 거기에서 또 13남매를 두었다.해마다 커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존 브라운은 농사도 짓고 말장사도 하고 목장도 하고 때로는 가죽장사, 땅을 사고파는 복덕방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흑인노예 해방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계속>
<김명희/시인, 번역문학가/워싱턴 DC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