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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투표 시간을 늘리자는 개정안이 바로 '여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권 여당이 투표율이 올라가는 것을 걱정하고, 어떻게든 국민들이 투표를 덜 하도록 만드려는 민주국가가 있고... 그게 내 조국이라는 사실에 좀 황당하군요.
몇 번을 생각해도, 이들이 왜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가장 단단한 정치세력으로(혹은 이익집단으로) 남아 있는가를 말해주는 이유로는 이것 이상 확실한 게 없네요. 바로, 저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 먹는 것을 옆에서 감시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구요.
저들이 정치를 저렇게 혐오감이 가도록 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정치에 더 관심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늘 저질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정치판이라지만, 그것은 이 땅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이 스스로에게 똥칠을 함으로서 그 냄새 때문에 국민들이 더러워서 피하도록 하는 격이라는 거죠.
1995년, 영주권자로서 미국 거주 5년이라는 시민권 시험 응시 자격이 되어서 필기시험을 치르고, 그리고 나서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한 인터뷰에서 면접관이 물어본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미국 시민이 되려 합니까?" 이미 정답은 시민권 시험에 대해 강의를 해 주시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투표를 하려 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제가 투표를 거의 빠지지 않고 한 것은 그때의 약속도 있지만, 제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 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보터스 팸플릿'이라는 책자를 각 가정에 발송해서 후보들의 공약, 주민발의안의 내용 등을 자세히 알려주고, 각 주마다 다르긴 하지만 제가 사는 워싱턴주의 경우 이 보터스 팸플릿은 기본적으로는 영어로 돼 있지만 주정부 웹사이트에 가면 스페인어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한국어 등으로 이 팸플릿이 번역돼 소개돼 있습니다. 즉 영어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도 선거의 내용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죠.
여기다가 지난 2007년부터는 투표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 '우편 투표제'를 도입해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투표일날까지 소인이 찍히면 유효하지만, 투표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주민들은 대부분 선거일 일주일 전이면 거의 기표한 투표용지에 본인임을 증명하는 서명을 하고 반송봉투에 우표를 붙여 선거관리사무소로 이를 보냅니다. 그럼 선관위에서는 이를 투표 당일날 선거 시간이 지나고 나서부터 일괄적으로 개봉합니다.
OMR 용지처럼 되어 있는 선거 용지는 판독기에 의해 읽어지고, 이 결과는 즉각 선관위 컴퓨터를 거쳐 실시간으로 공개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참관인들이 있으며, 선거 진행 요원들은 봉투를 열고, 투표용지 봉투에 서명 여부만을 확인한 후, 반송봉투를 개봉해 여기서 꺼낸 용지들을 모아 OMR 판독기에 넣습니다. 처리 속도는 당연히 손으로 일일이 하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한국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그렇게 닮고 싶어하는 미국의 제도도 조금 더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도록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투표율 상승을 위해 보완할 수 있는 방법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쉬운 것이 이번처럼 투표 시간을 늘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권력을 쥐고 있는 새누리당의 정치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투표율 자체를 낮추려 할 것이란 사실이죠. 그들은 우리의 참여를 원치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끌고가길 원할 테니 말입니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 민주주의가 조금 더 민주적으로,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들은 여기에 최대 걸림돌이라는 사실이 이번에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죠.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더 많은 이들의 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가를 새삼스레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 선출 때의 선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간 그 작은 몸짓들은 철옹성일 것만 같았던 대세론의 주인공, 이회창을 꺾을 수 있었으며 바로 지난 해 10월 26일엔 디도스 공격과 그 밖의 조직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후보는 나경원 후보를 꺾고 서울 시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가 조금 신경을 덜 썼던 총선 때 우리는 패배의 아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때의 패배의 요인엔, 선거시간의 이른 마감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라는 것은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시간의 선거시간 연장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시민들의 열망을 똘똘 뭉쳐서 막아버린 새누리당 의원들. 그들은 스스로가 반민주적인 정치세력임을 이렇게 다시한번 공개적으로 과시한 셈입니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투표하는 것은, 결국 이런 반민주 세력의 잔존을 도와주는 것이구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