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이번 시간에는 제가 전에부터 읽고 싶었던 최치원(崔致遠)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소개드리며,같이 공부해 볼까 합니다.
당나라 말기인 당 희종(僖宗: 873~888)이 즉위한 이듬해인 875년,유명한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발생합니다. 전형적인 환관들의 횡포와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운동으로,난을 일으킨 황소(黃巢)란 인물은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하였으나 과거 시험에는 계속 낙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황소의 집은 소금을 밀매하고 있었는데,난을 일으키자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 충해로 인하여 고향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자들이 속속 그들의 휘하로 모여들어 삽시간에 수 천 명의 군사가 모여들었고, 점차 세력을 확장한 반군은 드디어 희종(僖宗) 중화 원년(881) 1월 8일 당시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점령,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로 칭하게 됩니다.
이때 희종은 사천성(四川省)으로 망명하였으나 883년 이후 황소(黃巢)의 세력이 급속히 와해되어 드디어 884년 난이 진압되고, 황소는 호랑곡 전투에서 패한 후 자결로써 일생을 마칩니다. 이러한 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 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어 그 후 23년간 겨우 명맥을 이어가다가 907년에 이르러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편, 황소의 난이 발생하기 일 년 전인 874년, 신라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당나라로 유학한 최치원은 당시 17세 나이로 외국나라인 당나라의 과거에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합니다.
하지만, 외국인의 신분 때문에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황소의 난이 터져 희종(僖宗)이 사천성으로 피난간 뒤, 조정에서 황소를 치기위해 임명된 토벌총사령관인 고변(高騈)이란 장군의 휘하에서 종사관(從事官)이란 이름으로 벼슬살이를 비로소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고변(高騈)의 명령에 의해 작성한 격문(檄文)이 바로 최치원(崔致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입니다. 참고로 이 글은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격황소서(檄黃巢書)>란 이름으로 남아있으므로, 정식명칭은 ‘격황소서(檄黃巢書)’로 보아야 하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란 명칭은 따로 글로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참고로 ‘격문(檄文)’이란, 적군을 설복하거나 힐책하는 글과, 급히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 곳에 보내는 글 등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격문은 전쟁 또는 내란 때 군병을 모집하거나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거나 항복을 권유할 때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또한 혁명의 주모자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는 선전매체로도 사용되어, 글이 힘 있고 선동적인 게 특징입니다.
최치원(崔致遠)이 살았던 시기는 매우 암울했던 시기입니다.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한 당나라는 썩을 데로 썩어, 그가 원하던 꿈을 펼치지 못하였으며, 조국인 신라는 골품제에 갇혀 더욱 위태로운 형국이었습니다.
당시 사회변화를 갈망하는 6두품 지식인의 우두머리격인 그가 20세 초반의 나이로,망해가던 당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비록 그의 이름은 아니지만 남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존재를 온 천하에 알린 글이 바로 이 글입니다.
이글을 침상에서 읽고 있던 황소(黃巢)가 글의 내용 중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고자 생각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다"는 대목을 보고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일화가 이 글의 성가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래에 이 유명한 문장을 소개드립니다.
1. 광명(廣明) 2년(881년, 신라 헌강왕 7년) 7월 8일,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아무개(某: 고변(高騈)을 일컬음)는 황소(黃巢)에게 알리는 바이다.
廣明二年七月八日。諸道都統檢校太尉某。告黃巢。
대저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 하고,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슬기로운 자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백년(百年)의 생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萬事)는 마음이 주장된 것이매,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옳고 그름을 판별치 못하는가?)
이 글의 서문에 해당하는 첫 부분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구분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먼저 첫 번째 부분인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이란 대목은 북제(北齊)시대 유주(劉晝)의 <신론(新論).명권(明權)>에 나오는 “이치를 쫒아 떳떳함을 지키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循理守常曰道,臨危制變曰權。)”는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나오는 ‘권(權)’이란 개념은 <맹자(孟子). 이루장(離婁章)>에서 나오는 것으로,제(齊)나라 변설가인 순우곤(淳于髡)이 “남녀가 유별한 데, 제수나 형수가 물에 빠지면 어찌해야 합니까?”란 질문에 맹자가 “남자와 여자가 손을 닿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나 제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내는 것은 권(權)입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됩니다.
이때 맹자가 대답한 권(權)은 ‘저울추’를 의미하는 것으로, 저울추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의 위치에 따라 이동하는 것이므로 ‘상황에 따라 달리 대처해야 하는 행동원리’를 가리킵니다.즉 이 세상에 절대의 원칙은 없는 것이며, 그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최선의 행동원리를 취하는 것 또한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문장인 ‘슬기로운 자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게 되고,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智者成之於順時。愚者敗之於逆理。)’는 <후한서(後漢書)‧주부전(朱浮傳)>에 나오는 ‘슬기로운 자는 세력에 순응하여 일을 도모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행동한다(智者順勢而謀, 愚者逆理而動)’는 구절을 또한 변형하여 표현 한 구절입니다.
이어서, 최치원은 ‘살고 죽는 것은 비록 알 수 없으나,옳고 그른 것은 알 수 있는 법, (그대는 어찌 옳고 그름을 판별치 못하는 가?)’라고 일침을 가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습니다.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서문에 이어,이어지는 본문 내용입니다.
2. 지금 나는 황제가 내려 준 군대를 거느리고 역적을 정벌(征伐)하려는 것이지,너와 같은 역적을 상대로 싸우려는(戰爭) 것이 아니다. 군정(軍政)은 은덕을 앞세우고 베어 죽이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인즉,(토벌을 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은혜로써 회유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앞으로 장안(長安)을 회복하여 큰 신의(信義)를 펴려 하는 것이며, 공경하게 황제의 명을 받들어서 백성을 편안케 하고 간사한 꾀를 막으려 하는 것이지, (너희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軍政則先惠後誅。將期剋復上京。固且敷陳大信。敬承嘉諭。用戢奸謀。
본문 문장의 첫머리를 최치원은 전쟁의 명분을 내세우며 시작하고 있습니다.먼저, 그는 ‘정벌(征伐)’과 ‘전쟁(戰爭)’의 개념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서경(書經). 윤정(允征)>편에, ‘정벌(征伐)이란, 황제의 말씀을 받들어 죄인을 징벌하는 것이다(奉辭伐罪曰征)’라고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