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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중계 ? 아마 한 50-60대쯤 되는 인터넷 웹진 대표들 중에도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전무(全無)할 것이다. 물론 1970년대에 태어난 필자 역시 그 시절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내가 이른바 ‘전기중계’란게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게된것은 1940년대 초반 태생인 한 원로 방송인의 회고담이 담긴 수기를 통해서다.
1948년 5월. 휴전선이 아닌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져있던 그 시절. 북한이 압록강 수풍댐에서 남한으로 공급하던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려 남한의 전기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때가 있었다. 이때 전기가 악화된 남한에서 각 지역별로 공급되는 전기용량을 조절 전기사용량이 너무 많은 지역은 일시적으로 전기공급을 중단하곤 했다. 그만큼 전기사정이 열악했던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방송사가 라디오를 통해 중계하곤 했는데 이것을 이른바 ‘전기중계방송’으로 부르곤 했었다는것이다.
40년대 후반의 일이니 이른바 ‘전기중계방송’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당시 최소한 열 살 가까이는 되었을 지금은 칠순을 넘긴 사람들일것이다. 생각해보니 전기중계를 들을수 있던 사람이면 집안에 라디오를 소유(TV방송사는 아직 개국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사는 1956년의 HLKZ-TV)할수 있고, 집안에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잘사는 집이었을테니 ‘전기중계방송’을 기억할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그만큼 더 줄어들게 된다.
어쨌든 요즘 사람들에게 이해가 가기 쉽게 그 소위 전기중계방송을 요즘의 TV 기상캐스터와 같은 버전으로 재구성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상황인것이다. “네 오후 8시 30분 현재 서울 OO구 지역, 지금 전기사용량 한계에 막 다가서고 있는데요. 위험합니다. OO구 각 가정은 전기사용량이 많은 가전제품을 조속히 사용을 중단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다행입니다. 서민 밀집지역인 OO구와 OO구 아직 전기사용 한계량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시고 불필요한 전기 사용은 계속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 이게 웬일입니까 ? 서울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OO구 전기사용량 한계수위를 향해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빨리 전기 사용량이 많은 가전제품 사용을 중단하거나 전구소등을 해주십시오. 아, 그러나 안타깝습니다. 방금 OO구는 이미 전기사용량 한계를 넘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9시 정각부터 일시 정전조치가 취해지게 되겠습니다. ”
하지만 워낙 볼거리,놀거리가 없던 시절이어서였는지 수기를 쓰신 원로 방송인의 경우엔 이 ‘전기중계방송’도 어린시절의 꽤나 재미있었던 추억으로 간직하고 계신듯 했다. 그만큼 전기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생활에 큰 불편이나 지장은 없던 시절이란 방증도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같은 ‘전기중계방송’이 그저 할아버지,할머니 시절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쯤으로 듣고 넘어갈 상황이 아닌것 같다. 내일 21일 전국적으로 ‘정전 민방위 훈련’이 실시된다고 한다. 여름철 전기과다사용으로 인해 전기수요가 지극히 떨어질것에 대비한 훈련이라는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정전 경계상황일때는 전기수요가 많은 산업체나 가정의 절전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각상황에선 전국민 절전참여를 지속하는 상황에서 28개 시범 건물에 절전조치가 취해진다. 한편 이 시간대 각 산업체에선 피크시간 작업을 조절하고, 냉방 및 조명장치 사용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일반빌딩에서도 냉방장치 사용을 중단하고 컴퓨터,프린터등의 사무기기 사용도 중단하며, 자동문,환기팬의 작동도 정지시켜야 한다. 각 가정에서도 에어콘등 냉방기 사용을 중단하며 필요없는 전기 사용을 자제하는등 ‘정전 민방위 비상훈련’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사실 그냥 웃고말일은 아니다. 작년 가을 우리나란 하마터면 ‘블랙아웃’ 상태에 들어갈뻔한 전국적인 대규모 정전사태를 겪었다. 그리고 지난 겨울에도 몇차례 한전의 예비전력이 위험단계에 들어갈정도로 낮아진적이 있었고, 며칠전에도 그와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다보면 정말 민방위 정전 비상훈련정도가 아니라 40년대 후반에 존재했다는 ‘전기중계방송’이라도 부활하여 각 지역별로 전기공급 수위를 조절하며 그 상황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실로 40년대 후반에 존재했던 절전,정전방송의 상황이 60여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부활하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1940년대 후반의 ‘전기중계’가 전력상황이 그만큼 열악했던 시절이었기에 있었던일이라면,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은 삶이 워낙 풍족하고 윤택해졌지만 그만큼 전기를 써야할일이 너무 많아졌기에 벌어지게 된 ‘비상사태’다.
이럴때 할 일없는 문사(文士)가 할수있는 일은 ‘전기를 아껴쓰자’는 원론적인 이야기 그 이상은 없을것 같다. 요즘은 도심의 가게들이 손님이 안 들어온다며 냉방장치를 가동시킨채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한다니 진짜 기가막힌 일이다. 도대체 잘살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함부로 전기를 낭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40년대 후반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 존재했던 ‘전기중계방송’이 그로부터 60년이 지나 모든 것이 풍족하고 윤택해진 시절에 다시 부활해야만 하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왔다.
60년전의 전기중계가 전기공급사정이 워낙 열악했던 시절에 존재했던것이라면, 60년이 지난 2012년 6월 21일에 실시되는 ‘정전 민방위 훈련’은 삶이 윤택해져 전기를 써야할일이 워낙 많아지다보니 특히 여름과 겨울같은 전기사용량이 과다해질때 혹시 발생할지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 실시되는 훈련이다. 7,80년대의 등화관제 훈련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어쩌면 그때의 일이 연상되어 떠올려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여하튼 정말 전기를 아껴야할것 같다. 덮어놓고 쓰다보니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것 아닌가. 전기를 아껴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