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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중국 시가(詩歌)문학의 원류가 되는 <시경(詩經)>의 시를 하나씩 소개드릴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민간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보면 그 나라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는 법.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였던 주(周)나라는 각 제후국별로 유행하던 노래를 수집하여 국가통치의 참고자료로 삼게 되는데,이때 수집된 노래들 중 305여 편을 춘추시대 때 공자(孔子)께서 편찬한 것이 바로 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문학작품인 <시경(詩經)>입니다.
이 <시경>에는 몇 가지 판본이 전해져 오다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단 하나의 판본, 즉 노(魯)나라 사람 모형(毛亨: 大毛公) 및 조(趙)나라 사람인 모장(毛萇: 小毛公)이 전한 <모시(毛詩)>만이 전해지고 있어,<모시(毛詩)>가 곧 <시경(詩經)>을 뜻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경(詩經)>은 다시 분류하자면, 국가별로 유행한 민요인 ‘풍(風)’,조정에서 연주되던 음악인 ‘아(雅)’, 종묘제사 때 사용되던 음악인 ‘송(頌)’으로 나눠지는데, <시경>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민초들의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낸 국가별 민요, 즉 ‘국풍(國風)’ 160편입니다.
이 노래들은 채집당시에는 곡조까지 채집되었겠지만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곡조는 사라지고 가사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으며,그 가사내용들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가 힘들게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시경(詩經)>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역사상 권위를 인정받는 주석서는 한(漢)나라 때 정현(鄭玄:127~200)이 쓴 ‘전(箋)’과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574~648)의 ‘소(疏)’,그리고 남송(南宋) 주희(朱熹: 1130~1200)의 ‘전(傳)’이 그것입니다.
이정도로 간략히 <시경>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오늘은 위(衛)나라에서 유행하던 민요인 <위풍(衛風)>중 <하광(河廣)>이란 시를 소개드립니다.
<시경(詩經)>의 시들은 보통 2~5수 정도인데,대부분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법으로 반복하는 경우가 많아
대표적인 첫수 정도만 소개드릴까 합니다.
誰謂河廣(수위하광) : 누가 황하가 넓다 하나?
一葦杭之(일위항지) : 한 개의 갈대(葦)배로도 건널 수 있는 것을...
誰謂宋遠(수위송원) : 어느 누가 송나라를 멀다고 하나?
跂予望之(기여망지) : 발돋움(跂)만 하면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이 시는 <모시서(毛詩序)>에 의하면, 위(衛)나라에서 송(宋) 환공(桓公)에게 시집와서 양공(襄公)을 낳은 양공(襄公)의 모친이 양공(襄公)을 낳은 후 쫓겨나 위나라로 돌아가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칠 수 없어,
송(宋)나라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현대학자들 해석은,위(衛)에서 황하(黃河)를 건너 송(宋)으로 떠나온 행여 객이 고향인 송(宋)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지은 시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의 특징은, 그리움이 극에 달한 나머지,위(衛)와 송(宋) 사이의 공간적 거리 및 황하(黃河)라는 거대한 강을 상상 속에서나마 축소시켜 버림으로서, 고향에 돌아가고픈 심정을 달래보는 특이한 과장법(奇特的誇張)을 사용하고 있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 시를 인용한 글은 여럿 있는데,그중 하나로서는, <조선왕조실록>중 연산군이 자신의 모친인 폐비윤씨의 신주와 사당을 세우려 하자 신하들이 <河廣(하광)>을 인용하며 간(諫)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연산군 2년 병진(1496,홍치 9) 6월8일 (계미) 대간(臺諫: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이 합사(合司)하여 ... 아뢰기를,
“신주와 사당을 세우는 것은 비록 전하의 효성에서 나왔으나 선왕의 유교(遺敎)가 계시니, 크게 의에 어긋납니다.정은 무궁할 수 있으나 의(義)는 지나쳐서는 안 되니, 바라옵건대,정을 누르고 예를 따르소서.”
하나, 들어 주지 않으매, 다시 아뢰기를,
“무릇 처음에는 비록 정(情)에서 시작할지라도 마침내는 반드시 예(禮)와 의(義)에 합당하여야 바르게 되는 법입니다.신주와 사당을 세우는 것이 비록 전하의 효성의 정에서 발(發)하였으나,선왕의 남기신 뜻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옳지 못하니,그 정을 억제하시고 예(禮)와 의(義)에 합당하게 하소서.옛적에 위(衛)나라 딸이 송 환공(宋桓公)의 부인이 되어 양공(襄公)을 낳고는 쫓겨나서 위나라에 돌아왔는데,양공이 즉위하매 부인(夫人)이 아들인 양공을 그리워하였으나 의(義)로는 갈 수 없어서 곧 하광(河廣)의 시를 지었습니다.양공 또한 어찌 어머니를 생각하는 간절한 정이 없었겠습니까만,일국의 임금으로서 그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는 까닭은,사군(嗣君: 선왕(先王)의 대를 물려받은 임금)이란 아버지의 뒤를 거듭 이어서 (승중(承重):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할아버지의 통(統)을 직접 잇는 것) 곧 할아버지와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니,
(선대(先代)에 의해) 어머니가 쫓겨나서 종묘와 끊어졌을 때에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를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癸未/臺諫合司...又啓: “立主立廟, 雖緣殿下孝誠, 先王遺敎在焉, 此擧大妨於義。情雖無窮, 義不可過, 伏望抑情循禮。” 不聽。更啓: “凡事始雖發乎情, 終必止乎禮義, 然後乃得其正。立主立廟, 雖發於殿下誠孝之情, 揆之先王遺敎之意, 甚不可也, 請抑其情, 止乎禮義。昔衛女爲宋桓公夫人, 生襄公而出歸于衛。襄公卽位, 夫人思之, 義不可往, 乃作《河廣》之詩, 襄公豈無念母之勤, 思母之切? 以千乘之主, 而不得養其母者, 誠以嗣君承父之重, 與祖爲體, 母出與廟絶, 不可以私返故也。
<하태형/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 원장/금감위 자문위원/고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