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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옛 고구려와 대진국(발해) 영역이던 길림(吉林)성과 흑룡강(黑龍江)성까지 만리장성이 연결돼 있었다 말도 안된 헛소리 주장을 5일 발표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광명일보(光明日報)는 6일 국가문물국이 2007년부터 진행한 고고학 조사 결과 역대 만리장성의 총 길이가 2만1196.18㎞라는 결론을 얻었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이는 지나국이 이미 발표한 만리장성 길이의 배를 넘으며 지나국 북부의 모든 지역에 만리장성이 존재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공식화 것이다.
지나국 학계에서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명나라 때 쌓은 베이징 인근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지나국은 2009년 요동성 단동(丹東)에 위치한 고구려성 박작성이 만리장성의 일부로 확인됐다면서 만리장성 길이가 기존까지 알려진 것보다 2500㎞ 더 늘어난 8851.8㎞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그 뒤에도 지나국은 고구려 발원지인 백두산 근처 길림성 통화(通化)현에서 진한(秦漢)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만리장성 유적이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나국이 수.당 20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에 대한 열등의식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인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에서는 지나국이 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만리장성 유적들이 기존 만리장성의 개념과 전혀 다른 명나라나 고구려의 유적들이라면서 지나국의 양심불량한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있다.
지나국이 난하 하류지역인 산해관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임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지역까지 고무줄 늘이듯이 늘이는 이유는 환검조선을 비롯한 부여.고구려.대진국의 영토로써 고대부터 지나세력과 경계를 이루던 최저 마지노선인 요하 동쪽의 만주지역을 지나국의 영토로 확고히 하면서 지나국이 후견인으로 있는 북한의 김일성 일가권력이 붕괴되어 북한지역이 혼란에 접어 들 때 곧바로 북한지역을 접수하겠다는 꼼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 일가를 추종하는 남한 내부의 종북세력을 종국적으로 지나국의 개노릇할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명나라 때 동쪽 끝 산해관까지 쌓은 만리장성의 실체
줄여서 장성이라고 하며, 지나인들도 평소에 만리장성이라는 낱말보다 장성이라는 낱말을 일상 속에서 사용한다.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에서부터 감숙성(甘肅省) 〈자위관〉에 이르는 총 길이 6,352km에 달한다.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고 거론되었으나 2004년 12월 8일 지나국 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진.한(秦漢)대의 장성
장성은 전국 시대의 일부 국가들이 처음 쌓기 시작하였다. 조, 연, 진 등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국가들은 북방 초원세력의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았으며, 한, 제 등의 국가는 다른 국가를 막기 위해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22년에 진나라 시황제가 지나지역을 통일한 후 지나지역 안에 있던 장성은 파괴하고 북쪽에 만들어 졌던 여러 성들을 서로 연결시켜 장성을 쌓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몽염 장군에게 장성을 쌓도록 명하여 기원전 214년 경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장성은 현존하는 장성과는 위치도 전혀 다르고 쌓는 방법도 달랐다. 현재의 장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요동(현재의 랴오닝 성)에 이르렀고 서쪽은 임조(현재의 감숙성 민 현)에 이르렀다. 또한 흙으로 쌓은 것이기에 말이나 사람들이 넘어 다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높은 성벽은 아니었다.
한나라의 무제는 흉노를 몰아 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시켰다. 후한 시기에는 흉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이후 수백년 동안 장성의 개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비족 북위의 장성
남북조 시대에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북방의 유연을 방어하기 위해 원래 장성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옮겨 현재 위치에서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이후 북방 세력이 세운 국가인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은 어렵지 않게 장성을 넘어 침입하여 지나국은 3세기 동안 북방 민족의 세력 하에 들어 갔다. 원을 몰아 내고 명이 세워진 뒤 원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강화하여 지금 형태의 장성이 되었다. 농경 민족과 유목 민족의 경계선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초원에 건설된 것이다. 지나인들의 북방 민족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을 보여준 것이지만, 명나라 시대에도 장성을 넘어 침입하기를 되풀이 하였고, 명나라 말에는 만주의 여진족이 다시 장성을 넘어 와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세우기에 이른다.
명나라 말에 만주족(여진)이 발흥해 후금을 건국하면서, 명나라와 사이에 장성의 동단을 둘러 싸고 사투가 반복되었다. 후금은 명나라와 유리한 싸움을 진행하면서도 명장 원숭환에 방해로 장성의 동단의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후금의 계략으로 명나라 숭정제에게 주살 당했다. 그 후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멸망되고 후금으로 개명했던 청나라는 명나라 신하였던 오삼계의 안내로 산해관을 넘어 청나라의 지나지역에 대한 지배가 시작되었고 영토도 최대로 확장되었다.
현재 지나국 정부는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서 보호하고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시켰다. 세계 유수의 관광 명소로 이름이 높았으나, 지역 주민이 집의 재료나 관광객에 판매하기 위해 장성의 벽돌을 갖고 돌아 갔기에 파괴가 지속되었다. 또한 장성이 댐 공사로 인해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장성 주변의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은 지나국에서도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당국은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6년 4월에 열린 지나국의 학술단체 <지나국 장성 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지역은 전체의 20% 이하이고, 일부 현재 존재하는 지역도 30%이고, 남은 50% 이상은 모습이 사라졌다"라고 보고되었다.그리고 최근 지나국 정부는 단동 근교의 성 유적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국은 2009년 진장성과 명장성으로 대표되는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와 위치를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는 지나국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발표한 단동시의 ‘호산산성’이 고구려의 박작성이라는 사실에 언론이 주목하여 논란이 되었다. 2004년부터 고구려의 박작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지나 역대 왕조들이 건설한 장성 유적을 모두 조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이를 기존의 만리장성을 연장한 것이라 왜곡하여 발표, 대중의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