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13일은 흥사단이 창립한지 꼭 99년이 되는 날이었다. 순수 국내 한국인이 설립한 NGO의 효시였으며 동포들의 발전은 물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교육·인재 양성의 원대한 시작이었던 흥사단은, 민족의 스승, 위대한 지도자, 겨레의선각자로 추앙받는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경기도 홍언(洪焉),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평안도 강영소(姜永韶),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황해도 민찬호(閔燦浩),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등 8도 대표들로 창립됐다. 그 작은 시작이 지금 100년을 앞두고 있는 것.
2013년 흥사단 100주년은 동포들의 미국 이주 110년이 되기도 하는 해이다.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102명을 태운 미 여객선 갤릭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기착한 때가 1903년 1월 13일인 것. 이미 도산 선생은 1902년 25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상황이었다. 그러나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동포들의 이주와 막노동과 날품팔이, 소작농 등의 기구하고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학업을 포기, 동포들의 권익보호와 화합, 생활개선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도산 선생은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 시내 유다스트리트에 한인 최초의 교회 '상항연합감리교회'를 세워 동포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졌다. 거리에서 한국의 인삼 장수들이 서로 머리를 잡고 싸우는 것을 보고 새생활 공동훈련을 위해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설립,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는 등 동포들의 상부상조에서부터 조국의 해방을 위한 단결 고취 등 한인 사회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1907년 신민회 조직을 위해 귀국하였던 도산 선생은 평양과 대구에 자기회관을 설립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국내 진입을 위한 훈련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05인 사건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그 유명한 거국가를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