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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임진왜란 420년 7周甲(주갑)이 되는 해이다. 7년 80개월 전란을 어떤 맥락에서 볼 것인가?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다.1598년 12월 23일(음력11월26일)까지 7년 80개월 동안 지속된 임진왜란은 “16세기 최대전쟁”이었으며 “역사상 한국민족이 겪은 최대의 국난이자 가장 충격적인 전란”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몇 가지 견해를 살펴본다.
(1) “임진왜란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日帝(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와 때를 같이한 1910년대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진왜란사에 관련한 학술사업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조원래:『임진왜란사연구의 새로운 관점』)
(2) 한국을 끊임없는 외침의 피해자로 보는 역사관점은...국민들을 결집시키는 선전도구 역할을 했으며.. 한국인의 유일성과 미덕을 강조하는데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 역시 반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제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을 ‘역사화’하는 작업, 다시 말해 연구하는 작업을 추구해야지, 어느 특정 참전국이나 인물을 ‘악마’로 규정한다든가, ‘비인격화’하는 식의 접근은 지양해야 합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가를 연구해야지, 우리의 연구자체가 정치적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김자현: 「임진왜란 동아시아 3국전쟁」)
(3) “현재 한국의 유일한 교과서인 <국사>는 철저하게 조선을 옹호하면서 임진왜란을 서술했다.” “임진왜란의 배경에 대해서는 매우 부실하게 서술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한 맥락을 파악할 수 없었다.이는 임진왜란을 일본군의 ‘무단침략’으로 이해하여 임진왜란을 감정적으로 밖에 받아드릴 수 있었다.” “전쟁의 총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국의 실패에 대해 반성적인 성찰을 거부하는 등 객관성이 결여된 채로 조선의 피해사실만을 강조한다면 또 다른 극단적인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양국의 역사적 갈등을 극복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김덕원: 「한일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임진왜란 서술과 인식」)
(4) 우리나라의 “3차, 7차 (국사교과서) 모두 일본의 침략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의 폭력사용을 정당화 하고” 있으며, “전투에 대한 서술표현을 본다면 ‘무찔렀다’, ‘깨뜨렸다’, ‘진격’, ‘격파’, ‘섬멸’과 같은 군사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쟁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표현들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학생들에게 전쟁의 殺傷(살상)을 당연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최자윤: 「전쟁론의 관점에서 본 역사교과서의 임진왜란 서술」)
(5)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침략전쟁의 배경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위한 명나라 정복야망을 대표적인 이유로 들고 있다. 히데요시의 야망을 과대망상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교과서는 없었다. 침략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는 침략이라는 용어와 함께 ‘일본의 침략성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역사용어’로 사용되었던 ‘조선출병’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조선에 대군을 보냈다’, ‘渡海(도해: 바다를 건넜다)’ 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
침략전쟁기 일본의 잔혹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서술에 머물러 있는 반면 일본의 고통에 대해서는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전쟁의 피해는 모두에게 있었다는 잘못된 인식을 형성하기 쉽게 되어 있다. 침략전쟁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간단한 문화적 영향에 머물러 있다.(박재광)
(6) 일본은 임진왜란의 호칭을 처음에는 朝鮮征伐(조선정벌)이라고 하였으나 뒤에는 文祿慶長(문록경장)의 役(역)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石原道博은 『文祿慶長의 役』(1963)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 실현되자 지금까지 적으로 보았던 조선인이 일본의 동포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정벌이라는 표현을 버리고 文祿慶長의 役이 되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름 아닌 창씨개명의 강요를 비롯한 이른바 ‘內鮮一體’(내선일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이 이후 文祿慶長의 役이라는 호칭이 정착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66면)
(7) “풍신수길의 家紋은 1911년부터 총독부의 紋章(문장)이 되었고,2005년부터는 일본 총리부의 紋章이 되었다. 2005년 일본 수상 小泉(고이즈미)은 부산 롯데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풍신수길의 가문을 연설대에 부착하였다.” (이종락: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 왜성』, 278면)
“왜군의 약탈은 조직적인 것이었다” “왜군은 조선의 문물을 노략질하는 임무를 전담하는 6부를 두었다.도서부는 전적을 담당하고 공예부는 도자기류를 비롯한 각종 목공예품과 도공의 납치, 포로부는 조선인의 납치, 금속부는 무기와 금속예술품, 보물부는 금은보화 진기품, 畜部(축부)는 가축포획을 전담하였다.그들은 이 조직적 부대로서 조선인과 문화재를 약탈해갔던 것이다.” (최영희: 「임진왜란에 대한 몇 가지 의견」,『남명학연구』제7집)
* 임진왜란사 연구에서 이 6개 특수부대의 존재 및 활동에 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이 6개 특수부대의 존재는 조선을 침략한 목적이 납치, 약탈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한다. 납치,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은 전쟁이 아니다. 노략질, 분탕질이다. 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을 ‘임진전쟁’, ‘동아시아전쟁’으로 명칭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
“전라도는 검붉게 타 오른다”
- 일본 승려 慶念(경념)의 朝鮮日日記(1597년)에서
“8월 6일 하동에서 살육, 약탈한 무사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불태우고 주변의 들과 산도 죄다 불질러 전라도는 검붉게 타오른다. 노예상인들은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은 무사들에게 돈 주고 사서 이들을 쇠줄과 대나무 줄기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갔다. 무사들은 조선아이들은 묶어 놓고 그들의 앞에서 부모를 쳐 죽여 갈라놓으니 자식들은 공포와 탄식 속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이 비참한 광경은 바로 생지옥이구나.
8월 15일 저녁 남원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그날 밤새도록 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비참하구나! 하룻밤사이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죽었구나!
8월18일 남원성안으로 본진을 이동하여 들어가 날이 밝아보니 모든 길바닥에는 죽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여!
8월28일 전주를 떠나가면서 가는 촌길에도 들과 산에는 어디서나 남녀 구별 없이 칼에 베이어 죽은 시체들이 버려져 있었는데 五肢(오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었다.
11월 19일 울산에서 노예상인들은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조선인을 사서 줄로 묶어 모아서 오리처럼 몰고 앞으로 가는데 잘 걷지 못하면 몽둥이로 패면서 몰아세우거나 뛰게 하였다.
낮에 길에서 돌아다니는 젊은 조선 남자는 무사들에게 붙잡혀서 개처럼 목에 줄을 매어 노예상인에게 팔려갔다. 이들 조선인은 다시 원숭이처럼 목에 줄을 연이어 매어 줄 끝을 말이나 소달구지 뒤에 연결하고 뒤따라가게 하였다. (이종락: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 왜성』에서 재인용)
“4월에 적이 항복한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고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적장들은 물러가게 되자...백성들을 결박하여 남문밖에 열을 지어 세워놓고 위쪽에서부터 처형하여 내려오는데 우리 백성들은 칼을 맞고 모두 죽을 때까지 한사람도 탈주하지 못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 본말)
“귀를 자르고 눈을 빼며 살을 도려내고 가죽을 벗기고 심장을 도려내고 수족을 절단하여 몸뚱이와 머리를 잘라 머리는 긴 장대에 매어달고 시신은 장대에 매어 달아 놓았다.” (오희문:쇄미록제3 잡록 조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