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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끝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술 한잔 마시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은 12월 12일입니다. 전두환이 전방의 부대를 빼내 서울에 입성,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권력을 도둑질한 지 딱 30년이 되는 날이더군요. 그때 저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지만, 그때도 '전서리' 란 말은 어떻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두환의 세력이 서릿발처럼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었죠.
그때 전두환과 노태우가 이끄는 신군부, 즉 '하나회' 사조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승인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참총장을 비롯, 노재현 국방부장관,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 등을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특전사령관 부관이 사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해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5공화국이 출범하는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듬해 이들은 그들을 향한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결국 이들에게 끝까지 항거한 광주의 시민들을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지르며 권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불법으로 장악한 권력을 바탕으로 이후 87년 민주항쟁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민중에 대한 폭압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사실 김대중 대통령의 가장 큰 죄가 자신이 권력을 잡고도 전두환을 단죄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도는 좋았죠. 국민 통합, 그리고 그가 믿는 종교에 대한 신념으로서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치러야 할 피의 댓가를 치르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에게 지금까지 그 값을 치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두환이 자신이 흘리게 만든 그 수많은 피에 대해 제대로 댓가를 치르지 않은 것은 결국 이 땅에 '뭘 해도 결과만 내게 유리하다면 장땡'이라는 기회주의를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전두환은 지금도 떳떳하게 고개 쳐들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식에서 뒷짐지고 추기경님의 유리관 앞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우리에게 어떤 잘못된 모습을 남기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역사에서 지금까지 청산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첫 기회는 광복 때였습니다. 결국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고, 두 번째 기회였던 4.19때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계속해 우리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반복된 역사 안에서,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싸워 왔고, 그나마 지금껏 이만큼 일궈 온 것을 다시한번 '저들'에게 내줄 수도 있는 상황들에 다시 내몰리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는 기억하고 제대로 그 값을 치를 때에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12.12 사태가 30년 흐른 지금에도 그 가격을 치러야만 하는 처지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자각, 그리고 역사에 대한 각성이 더더욱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