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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무척 추워졌습니다. 이제 정말 겨울이 우리 옆에 와 있음을 실감합니다. 참 빠르게도 흐르는 시간입니다. 이제 올 한해도 이렇게 가는 모양입니다.
여느때처럼 뉴스를 접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다가 가슴이 턱 막혀 버리는 이야기 하나를 읽게 됐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이렇습니다. 경향신문 사회면에 뜬 김기범 기자의 보도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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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공원 개발 예정지 거주 60대, 용역과 몸싸움 뒤 자살
ㆍ주거이전비 문제 얽혀…서울시, 소송에 패하자 임대 입주권 취소 통보
개발예정지역에 세입자로 살던 60대 남자가 구청의 강압적인 겨울철 철거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엔의 사회권 위원회가 권고한 것처럼 세입자 주거권을 입법화하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지난 2일 밤 서울 마포구 용강동 시범아파트에 세들어 살던 김모씨(66)가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주민들은 “김씨가 젊은 철거용역 직원들과 몸싸움을 겪으면서 울분을 못 이겨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지난달 26일 시작된 철거작업이 한창이다. 철거용역업체는 주민들이 이사간 집의 배관을 뜯어내고 유리창을 부수고 있다. 주민들이 항의하면서 수차례 몸싸움이 벌어졌다. 2일에도 김씨는 용역업체 직원과 멱살잡이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과 서울시의 갈등엔 주거이전비 문제가 얽혀있다. 서울시가 아파트 철거 후 공원을 만들면서 임대주택 입주권을 받은 사람에게는 주거이전비 지급을 거부한 것이 발단이다. 세입자 41가구는 서울시에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심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는 철거 세입자에게 임대주택 입주권과 주거이전비를 모두 주도록 규정돼 있다.
서울시는 그러나 법원 판결 이후 주민들에게 공문을 보내 “법에서 정한 대로 주거이전비를 지급하는 대신 기존에 공급키로 한 임대주택 입주권은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사실상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강요였다.
추운 겨울철에 강제로 철거하는 것도 논란의 대상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동절기 강제철거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주민들은 “사람이 남아있는 집을 제외한다고 하지만 공동주택에서 옆집과 윗집을 부수면 폐허처럼 변하는데 철거가 아니라는 것은 궤변”이라고 지적했다. 한 주민은 “주거이전비 문제도 풀리지 않았는데 겨울 문턱에서 철거 작업이 시작되자 김씨가 누구보다 분개해왔다”며 “그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컸고 대책이 없는 처지를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지난 1일 발표한 한국사회의 분야별 제도개혁 제안서 <우리 사회 이렇게 바꾸자>에서 “주거권을 헌법상 추상적 권리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법률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도 지난달 11일 한국의 사회권규약 이행을 심의하면서 한국 정부에 강제퇴거를 막을 수 있는 지침의 입법화를 권고한 바 있다.
<김기범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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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주거의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 최악의 경우를 맞게 됐을 때는 당연히 국가가 보장해줘야 하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정부 차원에서 가난한 이웃들의 생존권을 묵살하고 있음을 다시한번 확인했을 때는 분노만 치밀어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달동네 판자촌'들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좀 크고 나서, 저는 왜 그 사람들이 거기에 그렇게 모여서 사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원래 대부분 우리나라 농촌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농촌에 대한 홀대는 이른바 곡물가격의 안정이라는 명분을 두고 자행됐고, 공장을 돌리기위한 저임금 산업예비군의 확보라는 실질적 필요성에 의해 도시로 밀려나오게 된 농촌공동체의 일원들은 결국 농촌의 실질적 해체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관 자체가 바뀌게 되었지요. '돈이 장땡이다'라는 걸로.
그리고, 이때부터 주거 공간 확보를 이유로 수도권 개발이 시작됐고, 그것은 자본을 가진 자들이 손쉽게 자기 자본을 증식할 수 있는 투기의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모습들은 계속 우리의 삶에 누적되어 지금 우리가 참으로 뻔뻔하게 세상을 투기의 수단으로밖에 바라보지 않는 오만함을 잉태하는 원죄가 됐고, 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희생하여 그들의 배를 불려준 셈이지요.
그런데, 버젓한 21세기 초입에도, '자기가 살 곳이 없어지는 것'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그 부끄러움을 다 나눠 지고 가야 할 사람들이 우리 자신들이란 말입니다. 주위의 이웃들에게 무관심했던 우리의 모습은, 결국 저런 식으로 가장 구석진 곳에서 목숨을 끊는 저런 이들의 모습으로 되살아오는 겁니다.
예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저 가난한 이웃에게 네가 해 준 것이, 바로 내게 해 준 것이다"라고...
부끄러워지고, 아파지는, 그런 고국의 소식입니다. 토요일 새벽, 저는 이 기사를 읽고 참 우울해집니다. 모두들 분노를 잃은 겁니까? 4대강 운하판다고 삽질할 돈 있으면, 이런 이들을 위한 주거비와 복지비로 쓰여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땅 파겠다고 결식아동 급식비를 깎아버리는 이 막장정권은 우리를 다시 70년대로 보내버려야만 속이 편하답디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벌써 30년전의 세상에 익숙해져 버린 겁니까?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