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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점심으로 싸 준 고구마와 밤, 그냥 먹기엔 아무래도 좀 퍽퍽한 음식들이라, 오늘도 변함없이 인터넷 카페에 와서 앉았습니다. 꽤 오랫만에 보는 듯한 맑은 날입니다. 시간이 좀 여유있어주면 좋으련만...
매주 화요일엔 ADVO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할인쿠폰 전단지가 배달되어야 하는 날입니다. 수요일엔 세이빙 소스라고 부르는 전단지가 배달되어야지요. 아무래도 연말 샤핑 시즌이라, 평소보다 두껍고 무겁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갖는 휴식의 무게도 그만큼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점심시간쯤 되면 꼭 배달하게 되는 콘도미니엄엔 늘 커피를 끓여주시곤 하는 조지앤 아주머니가 살고 계십니다. 그분이 몇달 전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계속 3층에 사는 그 분에게 편지를 직접 가져다 주었습니다.
부탁을 받고 이젠 커피도 제가 직접 끓입니다. 그건 우리에겐 하나의 '의식' 같은 게 되었습니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프레셔에 담고, 여기에 물을 붓고, 프레셔로 누르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가끔 1층에 살고 있는 브래드 아저씨나 탤리 할머니도 함께 와서 점심과 다과를 나눕니다. 그래서 내 점심시간은 '나의 점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점심' 시간이죠. 그리고 함께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런치 타임이 참 꽉 차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지앤 아주머니께선 요 며칠 물리치료를 받으러 도우미와 함께 병원에 갔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점심시간에 인터넷 카페에 앉아 있게 됐습니다. 그 집에서 끓여마시는 커피가 훨씬 맛있는데. 흑.
우리와 거의 함께 점심을 같이 하는 브래드 아저씨는 게이입니다. 파트너는 에이즈로 잃고, 자신도 에이즈에 감염됐지만 계속 약물치료 하면서 운동도 하면서 이걸 극복해냈고, 지금도 에이즈 보균자인 상태이지만 다행히 건강하게 자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하고, 상식과는 약간 거리가 떨어진 것 같은 동네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편견의 극복' 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같으면 아마 게이들도 이상하게 봤을 거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에겐 가까이 하기도 꺼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늘 제 옆에서 일상으로 보게 되면서, 인간과 인간으로서 가까워지면서 저는 제 인생 안에 '관용'이란 단어를 진정으로 깊게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브래드 아저씨의 생일이란 이야기를 전해듣고 조그마한 선물과 함께 얼굴에 뽀뽀를 해 주었습니다.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화색이 도는....게이니까 ^^;... 아저씨는 내가 그가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면서도 다정한 축하인사를 해 준 것에 대해 참 감사해 했습니다. 실상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람들의 '편견'은 언제나 가까이 할 수 있는 다리를 부수어 버리곤 합니다.
아... 벌써 30분 다 됐군요. 다시 일 나가야 하겠습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