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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묘사는 조상에 대한 효도,후손의 도리
유교의 효사상에 바탕한 전통 미풍양속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생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것 못지않게 자신과 가문의 뿌리인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사후 효도를 다하는 것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후손의 도리로 여겼다. 조상에 대한 효는 입신양명하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것과 조상의 유지를 잘 받들어 조상을 욕됨이 없도록 가풍을 잘 지키고 언행에 있어 뭇사람의 사표가 되어 뼈대있는 집안의 후손으로써 부끄러움이 없도록 함과 함께 자식을 많이 낳고 물려준 재산을 잘 지켜 가문을 번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신양명과 가문번성,품위유지는 자질,노력,운,재력이 뒷받침될때 가능성이 높은 것이어서 비록 뒤처지는 면이 있더라도 크게 흠이 되는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잘살거나 못살거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것을 다짐하면서 감사와 정성을 다하여 만든 음식을 차려놓고 지내는 제사를 모시는것이 조상에 대한 가장 근본이 되는 효도라고 할 수 있다.
제사는 세가지 형태로 모신다.첫째는 고조부님까지는 지방을 써서 신주를 모셔놓고 집에서 기일날 지내는 기제사다.둘째는 고조부모 바로 윗대 조상인 5대 조부모님부터 시조 할아버지,할머니까지 추수가 끝난후 11~12월경 정해놓은 날짜에 산소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시제(時祭)인데 시제를 지리산 주변 시골에서는 흔히 묘사(墓祀)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설날과 추석 명절에 지내는 차례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고조부님까지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는 조상님들 모두를 모셔놓고 지낸다.
정성을 다해 준비하던 묘사는 집안의 대사(大事)
기제사,차례,묘사 가운데 가장 큰 집안행사는 단연 묘사다. 기제사는 직계후손들이 모여 지내고 명절 차례는 마을 대소가 친척들이 모여 각집을 차례로 돌며 제사를 지내지만 묘사는 전국각지 후손들이 제군으로 참여하여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객지로 나가사는 사람이 거의 없이 대부분의 식솔들이 농사에 기대 고향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묘사는 문중과 마을의 가장 큰 년중행사였다.
특히 먹고 살기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에는 묘사를 지내는 산소 주변은 동네 아이들 까지 떼로 몰려와 북적댔다. 묘사는 문중 또는 종중에서 종중일을 보는 유사가 총책임을 지고 준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종중 소유 논을 가진게 적어 형편이 어려운 일가들을 지정해 대여섯마지기씩 묘사답이라는 이름으로 농사를 지어먹게하고 그 댓가로 묘사를 준비토록하여 지내는게 일반적이었다.
묘사답을 짓는 후손은 묘사답에서 나온 소출의 일부로 묘사음식을 준비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가족의 식량으로 사용하였다. 어렵게 살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묘사 준비는 정성을 다하였다. 정성을 다하는것이 후손된 도리인데다 조상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지만 제사음식 준비를 소홀히 하여 묘사 지낼때 집안 어른들로 부터 칭찬대신 꾸중을 듣게 되면 묘사답이 다른 일가에게 넘어갈 수 있기에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다.
묘사 준비는 대략 보름정도가 걸렸다. 생선과 포,고기,과일,술만 읍내 시장에서 사오고 나머지는 모두 집에서 손수 준비했기 때문이다. 묘사음식을 준비할때면 모든 식구가 달라 붙는다.먼저 엿을 만드는데 할머니,어머니,딸들은 집에서 길러서 가루를 내놓은 엿질금 가루를 고두밥과 섞어 항아리에 담가 삭였다가 광목자루에 퍼담아 넓은 항아리에 와이자형 가름대를 걸쳐놓고 그 위에 얹어 짜낸다.
다 짜고 나면 달보드레한 맛이 남아있는 엿지게미는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주고 엿물은 가마솥에 옮겨 하루내 장작불을 때가며 주걱으로 저어 졸인다. 중간쯤 지나 어느정도 묽어지면 조청으로 쓸것을 1되짜리 큰 소주병에 담아 내놓고 나머지는 주걱으로 떠서 죽 흘러 내리지 않고 뚝뚝 방울져 떨어질때 까지 다린다.다 다려지면 다리를 접친 둥근상이나 널판지에 콩가루나 밀가루를 뿌린다음 떠내 놓았다가 어느정도 식으면 엿달음질에 들어간다.
엿늘이기는 할머니와 며느리가 마주보고 앉아 퍼낸 갱엿을 적당량 떼내어 양쪽에서 잡아 당겼다 합쳐 또 잡아 늘이기를 수십번 반복하여 색깔이 하얀색에 가까워 질때쯤 상위에 엄지 손가락 굵기로 늘여 놓았다고 굳어지면 칼로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이때 잘려진 단면에 구멍이 많이 나있으면 엿이 잘 만들어 졌다고 여긴다.
엿만들기가 끝나면 요즈음 한과라고 부르는 산자,콩과자,튀밥과자,깨과자를 만든다. 산자는 쌀가루를 반죽하여 칼국수용 밀가루 늘이듯 늘여서 적당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솥뚜껑을 뒤집어 걸어놓고 그위에 체로 쳐 씻은 굵은 모래를 부어 불을때 달구어지면 그속에 파묻어 구어내 양면에 조청을 바른후 잘게 부순 쌀튀밥(뻥튀기) 가루를 뿌려 만든다.
콩과자는 검은콩과 노란콩등을 섞어 볶은후 조청에 섞어 널빤지에 대략 3센티 두께로 굴림대로 펴놓았다가 굳어지면 칼로 먹기좋은 크기로 네모지게 자르면 완성된다. 콩과자는 콩으로만 하지 않고 볶은 흰깨,검정깨 또는 쌀튀밥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쌀튀밥 과자와 깨과자도 이러한 방식으로 만드는데 달면서 고소한게 맛이 그만이다.
다식 만드는것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식은 주로 봄에 소나무에서 따놓은 송홧가루와 콩가루,검은 깨가루,흰깨가루를 조청에 섞어 이긴후 다식판에 다져넣어 만드는데 검은깨 가루로 만든건 약간 쓴맛이 나는게 특징이다. 감주라고 부르는 식혜도 만드는데 식혜는 대개 엿만들때 같이 숙성시켜 한꺼번에 만든다.
남정네들도 바쁘다. 장날 읍내로 나가 묘사장을 봐오는건 대개 남정네들 몫이다. 묘사장은 대개 부부가 같이 보는데 짐이 무겁기 때문에 남자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과,배,유자등 집에 없는 과일과 돼지고기,참조기,대합(백합),꼬막,탕감용 마른 홍합과 새우,낙지, 상어포,오징어,피문어 다리등을 크고 좋은것으로 골라 산다.
묘사장을 봐온 뒤에는 젯상에 놓을 감홍시를 딴다. 감홍시는 주로 넙적감인데 소쿠리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메고 감나무에 올라가 대나무로 만든 간짓대를 이용하여 따 담는다. 저녁에는 땅속에 묻어둔 밤을 꺼내 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놓은 생밤을 잘드는 호주머니칼로 다이야 몬드식으로 쳐서 생율(生栗)을 만들고 솥에 삶은 밤을 겉껍질과 속비늘을 벗겨 숙율(熟栗)을 만든다.
손재주가 좋은 남정네는 벨트처럼 납짝한 피문어 다리와 건오징어 몸체를 칼로 새,나비,나무,국화꽃등을 기기묘묘하게 조각한다. 봉황형태를 만들기도 하는데 젯상에 올려놓으면 아름답고 보기 좋다. 닭을 잡는것도 남자들이 한다. 집에 놓아 기르던 재래종 닭들 가운데 가장 크고 좋은 장닭을 잡아 목을 비틀어 숨을 끊은 다음 뜨거운 물에 데쳐 꺼내 털을 뽑아 도랑으로 들고가 잡는다.
떡은 세가지를 만드는데 시루떡,인절미,흰떡(백설기)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떡국용 흰떡가래만 빼는것외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방앗간이 없었던 때라 직접 떡을 만들었다. 묘사용 시루떡은 일반쌀인 멥쌀을 물에 불렸다가 소쿠리에 옮겨 물을 뺀후 동네 디딜 방앗간으로 가져가 찧는다. 두명이 천정에 매단 줄을 잡고 발을 디디면 절구가 올라오고 발을 떼면 절구 가 내려간다.이때 한사람은 절구통옆에 앉아 간을 맞추기 위한 소금을 뿌린후 절구가 올라가는 틈을 이용 주걱으로 절구안을 뒤집어 준다.
어느정도 찧어지면 국자로 퍼내 체로 쳐서 덜 찧어진것을 다시 절구에 부어넣고 찧는것을 되풀이 한다. 가루가 다되면 집으로 가져와 시루에 3~5센티 두께로 깐다음 팥가루로 덮고 다시 쌀가루를 깔고 팥가루를 덮는걸 반복한후 삼베와 광목천으로 덮고 솥두껑을 얹고 불을 땐다. 인절미는 찹쌀을 솥에 쪄 고두밥이 되면 확독 또는 절구통에 부어넣고 떡메로 친다음 콩고물을 뿌린 널빤지에 옮겨놓고 적당한 크기로 떼내 굴려가며 길게 늘어뜨려 만드는데 인절미를 만들때면 아이들까지 온식구가 옆에 둘러앉아 어서 빨리 한점 먹으려고 안달을 한다.
흰떡은 대개 동네 정미소에 있는 떡국용 기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