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만 인파가 몰렸던 1960~70년대 남원 춘향제
1960~70년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남원에서 열렸던 '춘향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치러졌던 민속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시골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쓰고 있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전기가 들어온후에도 열악한 경제수준 때문에 텔레비전 보급이 늦어 도시와 같은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하였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건전지를 사용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여름과 가을에 보리와 쌀 한되씩을 청취료로 냈던 유선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방송을 듣거나 마을 순회 약장수 공연,1년 두세차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군청 공보실에서 저녁에 상영해주던 야외 영화관람,정월 대보름 농악놀이와 봄,가을 화전놀이가 오락문화 생활의 전부였다.
이처럼 문화생활에 목말라 있던 시절, 춘향제 행사는 갈증을 잠시나마 해소시켜 주는 오락문화의 오아시스였다. 사나흘이라는 짧지않은 기간동안 춘향뽑기,그네뛰기,명창대회,궁도대회,씨름,가장행렬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다보니 참가자,구경꾼등 남원 인근은 물론 전국에서 수십만명이 모여 들어 행사를 즐겼다.
이처럼 수많은 인파가 몰리다 보니 이들을 상대로 한몫 보려고 달려온 장사꾼들도 엄청났다. 행사가 열린 광한루 주변공터와 요천 뚝길과 천변 빈곳은 천막을 친 간이식당,잡화상들이 빈틈없이 들어섰고 식당 마다 막걸리 한사발에 순대국,국수를 말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로 미어 터졌다.
차력사를 동원한 약장수 공연이 발목을 붙잡고 간장종지 바꿔치고 원판 돌리는 야바위꾼이 촌사람 주머니를 털기위해 손모가지를 바삐 움직이며 순진한 사람들을 홀리는가 하면 좌판을 벌여놓고 손님을 부르는 장사꾼들의 걸쭉한 입담이 맞부딪치는 난장이 흥청거렸다.
긴장과 탄성,눈물과 웃음,즐거움을 선사하던 서커스
이처럼 볼거리,먹거리가 넘쳐나는 춘향제 행사기간 동안 가장행렬,춘향뽑기 못지않게 구경꾼들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서커스 공연이 있었다. 곡예단,곡마단이라고 불렸던 서커스 공연은 당시 시골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따라서 춘향제가 열리면 동춘 서커스,대우 서커스단을 포함하여 많게는 세개이상의 서커스단이 남원 광한루 주변에서 공연을 하였다.
서커스단들은 춘향제 행사가 열리기 열흘전 부터 천막을 치고 밴드와 원숭이를 태운 선전용 스리쿼터를 몰고 남원시내와 시골을 돌아다니며 "지상 최대의 서커스 공연"이 열린다며 선전하고 다녔다. 서커스 공연장 출입구 옆에는 코끼리 한마리를 매어놓고 카우보이 차림을 한 난장이 단원들이 손님들을 부르곤 하였다.
요즈음 서커스 공연장에는 관객용 플라스틱 의자 수백개가 놓여져 있어 손님들이 편안하게 관람을 하게 되어있지만 당시 서커스 공연장 관람석은 맨땅에 가마니를 터 만든 거적이나 멍석이 깔려있었다. 서커스 공연은 아이들이 가장 보고싶어 했지만 볼거리 문화가 없었던 시절이다 보니 어른,노인들도 공연장을 많이 찾았다. 갓이나 중절모를 쓰고 담뱃대를 든 도포차림의 할아버지들부터 아저씨,아줌마,처녀총각,어린아이등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겼다.
어른,아이가 뒤섞여 빼곡이 들어앉아 아슬아슬한 공중그네타기,장대 외줄타기가 펼쳐지면 손에 땀을 쥐었고 접시 돌리기,통굴리기,외바퀴 자전거타기,난장이 불쇼가 이어지면 탄성을 질렀다. 장난스런 원숭이 묘기가 나오면 배꼽을 잡기도 하였다. 긴장과 탄성과 웃음뒤에 신파극이 공연되면 눈물을 훔쳤다.그러다 막간을 이용하여 곡마단 가수가 '동백아가씨'를 열창하고 끝나면 반드시 펼쳐지는 장면에서 시골노인 관객들은 창황망조하여 어찌할줄 모르게 된다.
다름아닌 발레공연이다. 당시 서커스단에는 묘령의 아가씨 단원 3~5명으로 구성된 발레단이 있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공연이었지만 젖가슴만 살짝 가리고 우산을 편듯한 바짝들려진 짧은 둥글납작 발레치마에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채 하얀 삼각팬티만 입은 발레단이 무대 우측에서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양팔을 앞으로 모아 옆으로 쩍벌리는 모습을 반복하며 옆걸음으로 종종대며 무대중앙으로 나와 발을 앞으로 쭉쭉 올리는 발레춤을 추노라면 관람석은 일대 소란이 일어난다.
눈을 퉁방울처럼 뜬채 발레 아가씨들의 몸매를 감상하며 마른침을 삼키거나 휘파람을 불어대는 젊은이들과 달리 갓을 쓴 노인들은 도포자락으로 눈을 가리는가 하면 중절모를 쓴 중노인들은 시선을 둘곳을 찾지 못하고 허둥댄다. 그러다 결국 노여운 질책성 목소리를 터트리고 만다 .
갓을 쓴 노인 한사람이 손에 든 담뱃대로 무대위 발레단을 가리키며 "허어 저 가시내들이 옷을 입은거여,걸친것이여"하며 연신 삿대질을 하며 장탄식을 터트린다.그러면 옆에 같이온 노인도 참을 수 없다는듯 "꾀를 홀랑 벗었그만 그려, 세상 말세가 다됐어"하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자 조금 나이가 적어 보이는 낡은 잠바를 걸친 중절모 쓴 중노인이 "삼각 빤스는 입었으니께 홀랑 벗은건 아니구먼요" 중노인의 말에 삿대질하던 갓쓴 노인이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빤스를 입은게 저 모양인가. 뉘집 딸년인지 모르것지만 백주대낮에 남정네들 앞에서 앞에서 가랭이 벌리고 다리 몽댕이를 들었다 놨다 저게 무슨짓이여, 에미애비가 저런 딸년을 그냥 놔둔단 말여...."
친구노인도 목소리를 높이기는 마찬가지 "남여칠세부동석인데, 가시내가 홀딱벗고 토깽이(토끼)처럼 뛴당가, 세상에 저런 빌어 처먹을 놈의 요상한 춤도 다 있구먼 딸년 낳아서 저런 요사스런짓 할것 같으면 아예 낳자마자 땅에 보독시레서(내동댕이쳐) 죽여야 혀" 하며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눈을 흘낏거리며 볼것은 다본다.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해온 '동춘 서커스' 살려야 한다.
이처럼 긴장과 탄성,즐거움과 충격을 안겨주며 남녀노소에게 최대의 볼거리를 제공했던 서커스는 서민들로부터 사랑과 각광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한 서커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중심에는 국내 서커스단 창단 1호인 '동춘 서커스'가 있었다. 동춘 서커스는 1925년 창단된 이후 1960~70년대 최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에는 단원만 해도 250여명에 이를정도로 규모가 컷고 한국 연예계를 풍미한 허장강, 서영춘,배삼룡,이주일,이봉조,남성,남성남,장항선등이 동춘 서커스를 거쳐갔다. 곡예뿐만 아니라 '어머니 울지 마세요'등 애절한 신파극과 마술,원맨쇼,노래,춤등으로 구성된 레파토리는 큰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본격 보급되면서 드라마,쇼등 볼거리 대중문화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면서 서커스는 가수들의 극장쇼와 함께 사양길로 접어 들었다. 수많은 서커스단이 수지를 맞추지 못해 경영난에 빠진끝에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제 남은 서커스단은 '동춘'서커스단 뿐이다. 그러나 이제 동춘 서커스단마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한국 서커스단 1호라는 자존심으로 간난신고를 극복하면서 어렵게 단체를 유지해 왔으나 경영난에 빠지는 바람에 지난해 90여명의 단원 가운데 절반인 45명을 내보내며 생존투쟁을 벌여 왔지만 그나마 한계에 부딪쳐 이들에 대한 월급마저 3개월째 못주고 있고 빚이 4억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올해들어 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지방 축제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공연을 할수없게 된게 치명타가 되어 이제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몰린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서커스에 대한 인기가 시들한데다 경제난까지 겹쳐 하루에 고작 많아야 관객이 100여명에 불과하여 생존이 어렵다 보니 곡예기술을 배울려는 사람이 없어 한국인 단원은 5명뿐이고 나머지는 중국출신 단원이라고 한다.
동춘 서커스단이 문을 닫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이 앞다투어 서커스를 살려야 한다고 여론화하고 수원시가 무상으로 수원야구장 주차장 공간을 공연장으로 내주는등 관심과 격려가 잇따르고 있어 동춘 서커스를 이끌어오고있는 박세환 단장도 동춘 서커스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한다.
동춘 서커스 존폐문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