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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를 쓴 신라 기마인들은 흉노와 선비족에 흡수된 사카(스키타이)족이였다
기원전 800년에 서양세계에 등장하는 유라시아 초원세력을 총칭하는 말로써 서양에서는 스키타이라 불리우고, 동양에서는 흉노라고 기록된 '사카'라는 말은 우리말 해해(하하)의 변음어다. 곧 해를 숭상하는 태양족이라는 의미다. 즉, 동북아에서 초원길을 따라 서진한 단군조선의 갈래라는 의미다.
1-4세기 남3한 중 진한땅인 한반도 동부지역(영남)으로 유입된 신라인들은 고깔모자를 쓴 사카족이다. 해민족의 부도사상을 인도에 전파하여 불교의 교주가 된 석가모니가 바로 사카족이다. 고깔모자를 쓴 이들 사카족은 페르시아의 전쟁포로로 잡혀 페르시아 고대 그림에 그려지기도 했다.
코카서스 인종과 혼혈화된 사카족은 흉노족에 포함되었고, 한나라와 선비의 연합군이 흉노를 공격할 때 40여만이 선비족으로 흡수되었는데, 고구려와 전쟁 중에 패한 모용 선비족이 동해안을 따라 영남땅으로 들어 와 석탈해 왕조의 이사금 시대를 종식시키고 마립칸 시대를 연 신라 김씨왕조인데, 이들 중심세력이 사카족이라고 볼 수 있다.
가부장적인 초원문화답게 성기와 성행위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신라인들의 토우. 발발이맨들의 기원? 빈번한 강간과 성폭행 사건들의 근원적 유전인자들인가?
영남지역 암각화에 그려진 신라시대 그림들에는 고깔모자를 쓴 많은 신라인들의 인물상들이 그려져 있으며,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그려 놓은 그림들도 많다. 마치 인도에서나 볼 수 있는 적나라한 성행위 그림들이다. 이는 초원세력의 개방적인 성문화를 반영하는 암각화 그림이며, 미색과 뛰어난 섹스테크닉으로 신라왕들을 갈아치운 미실이 대변하듯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개방적인 성문화라 할 수 있다.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 고려인들은 냇가에서 남녀가 서로 목욕을 하면서 지나인들은 더러운 족속이라며 비아냥거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실크로드를 달려 온 신라 김씨왕족,인도 석가족과 신라 사카족,그리고 고깔모자의 의미
"신라의 김씨왕족은 만주와 지나국을 지나 중앙아시아 천산 너머에서 살던 사람들과 관련성이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알타이 지역과 천산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천산의 동쪽과 알타이 지역은 유사이래 동서 인종의 충돌과 혼혈지역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람과 문화가 넘어 오다가 기원후에는 동쪽의 사람과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산 동쪽으로 넘어 온 유럽인종 중 일부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를 지나 한동안 지나 동북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최종적으로 평양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 온다."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 정형진 지음)
문무왕비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가 한(漢) 무제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했던 '투후(?侯)' 김일제(BC134~86)의 7세손 성한왕(星漢王)이라 적혀 있다. 김일제란 인물은 한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로 후에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았고 무제 사후에 '투후'라는 후작을 받은 이니 신라왕족이 흉노의 일파로 연결된다.
경주 박물관 마당의 서역 문양석. 경주 소재의 사찰에서 발견
그러나 신라 김씨 왕족이 집권했던 2~6세기 사이 신라가 채용한 적석목곽묘는 우리나라 삼국 중 유일한 양식으로 북방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는 묘제라는 점. 이 시기 황금유물을 비롯한 북방초원문화의 상품들도 다량 유입되었고 서역의 문물들이 대거 발굴된다는 점이 문무왕비 내용을 무시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는다.
이외에도 고깔모자, 무덤에서 발굴되는 늑대 관식, 사슴뿔 모양의 왕관, 계림 김알지 설화를 반영하는 것 같은 페르시아의 구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주변문화를 차용한 것인지 주민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경주 괘릉. 그 앞을 지키는 서역 무인상의 존재가 흥미롭다
지나국의 풍수지리가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왕릉도 평지에 조성했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괘릉은 연못을 메워 조성했기에 무덤방에 물이 차, 관을 천정에 매달았다고 해서 괘릉이다. 지나국의 장묘문화와 비교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괘릉에 무인 석상은 왜 서역인일까? 단순히 신라에 들어와 있던 용감무쌍한 서역 용병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뿐인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에서 온 아리안족 여인이니 김해 김씨와 허씨는 아리안족인가? 신라나 가야나 모두 혈통적으로 사카족의 나라인 만큼 사카족의 나라 인도나, 백인들과 혼혈화된 유라시아 초원세력과 연결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중 지장이 지나국을 유학할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의 왕인데 이미 불기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 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는 것. 이것이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 정형진'의 저자 정형진의 주장이다.
기록에 의하면 휴도왕(休屠王)은 '금인제천(金人祭天)'을 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금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금인이 불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게 해석하면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었기에 '금인(金人)'이라 불린 불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데(<한서> 김일제전에도 휴도왕이 금인제천하는 까닭에 한 무제인 유철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다)
백마사는 이 금인(金人)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금인이 꿈에 나타나 백마에 경전을 싣고 오다(金人入夢白馬?經)'를 옮겨 놓은 기둥이 보인다. 여기서 일륜을 걸고 있는 금인이란 바로 불상을 일컬음이다. 휴도왕의 '금인제천'을 불교의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