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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종영이 임박했을 선덕여왕, 참 화제도 많이 뿌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선덕여왕이 결국 '팬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만 하는 중입니다.
선덕여왕은 팬터지를 이룰 수 있는 요건을 다 갖췄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제가 생각하는 팬터지의 가장 큰 요건은 '현실세계에서 이루고 싶은 세상의 모습을 가공의 세상을 통해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기에, 선덕여왕은 그런 요건을 제법 갖춘 셈이지요.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가 '선덕여왕' 때문에 도통 통하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저는 뒤늦게 열심히 비디오를 시청했습니다. 어제부로 49회까지 쫓아 왔으니, 꽤 많이 달려온 셈입니다. 처음엔 뭐 그런 걸 다 보냐고 딴죽을 걸던 아내가 대화체까지 틀려져 "뭐하느냐, 빨리 틀지 못하고"라고 말할 때는 격세지감적 황당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평소에 아내와 나란히 앉아 뭘 같이 볼 기회가 그리 없는지라, 이것도 괜찮은 부부간의 접촉 방법이다 싶습니다. (허니, 나한테 좀 기대봐... 등 만져줄께... 등등) 아무튼, 이런저런 이야기는 일단 전개의 발목을 잡으니 넘기고, 우선 제가 느낀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선덕여왕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세계를 무척 빗대었더군요.
저를 제일 감동시킨 부분은 화백회의의 폐지에 대한 부분에서, "(화백회의가) 백성이 아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면, 그것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부분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국회의 모습을 상당히 암시해주는 듯 해서 정말 씁쓰름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몇 회 전 방영분에서 화백회의 참가자들끼리 고성에 삿대질에 난장판을 치며 싸우는 모습도 어느나라 국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지요. 또, 공주가 등극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참여정부 초기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기도 했던 부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전달하는 강한 메시지를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듣고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인데, 화제가 집중되는 방향이 늘 그렇듯 배우들의 연기와 촬영 에피소드들, 그리고 포괄적 그림이 아닌 매회 매회에 대한 반응, 스포일러를 찾기 위해 눈 뻘건 사람들로만 채워지니 그것이 좀 아쉽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매회 엄청난 돈을 써가며 보여주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깊이 알았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기득권들의 당연한 개혁에 대한 반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초월합니다. 극중에서 매점매석을 일삼으며 조세개혁에 기를 쓰고 반대하고, 마침내 군량을 풀어 궁핍한 백성들이 쉽게 식량을 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빌미삼아 적절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주에 대한 탄핵을 감행하는 귀족들의 모습, 과연 그것이 오늘날 기득권들과 다른 게 뭐가 있을까요?
소위 그때보다 많이 자각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진자들의 입이 되어 인터넷 게시판에서 개념글 아래에 악플을 다는 지금 세상이, 그 안에서 그려지는 무지몽매한 개혁 반대자들과 뭐가 다를까요?
그저 우리의 '자각'이라는 것, 그 각성 속에서 함께 찾아보는 실천의 길들. 그것만이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 미국에서 오바마의 개혁이 벽에 부딪히고 있는 것처럼, 아직도 '무지몽매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개혁은 더욱 어려운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정확한 역사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 그것을 통해서 받은 교훈들을 계속 되새기는 것은 중요한 일일 수 밖에 없겠지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