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시조 해모수의 17대손으로 고추모의 다물국시 실현한 광개토태왕
900년 고구려의 기원은 부여로 단군조선의 5가 공화정을 접수하고 부여를 세운 해모수.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고진의 손자 고모수(불리지=고추모 아버지).고추모에서 17대손 고담덕(광개토태왕)까지 이어 진다. 사학계가 4국사 이전의 고대사의 진실을 담고 있는 [환단고기]를 위서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왕족의 정확한 족보를 이해못하고 부여5대 단군이 되는 고두막이 동명성왕인데, 고추모를 동명성왕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의 해모수왕조를 접수하고 골본부여 세운 동명(고두막)의 후예가 백제를 세운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다. 동부여에서 골본(환인)부여로 망명하여 부여7대 단군에 즉위하고, 국호를 고리(고려=고구려)로 바꾼 고추모는 부여왕통을 계승한 고구려의 개국시조다.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광개토태왕이 백제에 대하여 부여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고구려가 부여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 서문 해석] "시조 추모왕(고추모)께서 터를 닦으셨다. 북부여로부터 나와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고손자) 천제(단군을 말하며,북부여 왕들도 단군이라 했다)의 아들이요,(해모수의 손자 고진의 아들 고모수-불리지)-의 아들) 어머니는 하백녀로 알(계란=태양)에서 태어나 성스러움이 있었고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동부여 왕자 대소의 암살을 피하여) 수레로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엄리대수 때문에 (건너지 못하자) 왕(고추모)이 나루터에 이르러 말하여 가로되,
나는 황천(皇天천제=상제=하나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강에서 무역을 하는 하백의 딸)다 하니, 갈대와 거북이가 소리를 듣고 응한 즉 갈대가 엮어 지고 거북이가 뜬 (다리가 만들어진) 후에 건너서 비류곡의 골본(환인) 서쪽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삼았다(홀본=골본/졸본은 지나국이 고구려를 비하하여 표현하여 병사 졸로 사용한 말이다.서기전 239년에 해모수가 길림 웅심산에서 즉위하여 북부여를 열었고 서기전 86년에 동명왕 고두막이 해부루를 부여의 제후로 삼고, 골본-환인-에서 즉위하였으며 서기전 58년에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하여 북부여 골본으로 와서 아들이 없던 북부여왕 고무서의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대통을 잇고 서기전 37년에 국호를 선조나라 고리-고려-로 개명함).....
유류왕(제 2대 유리왕)에게 도로써 다스려 흥하게 할 것을 유언하고 용산에 묻혔으며, 대주류왕은 그 업을 잇고 ....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실제로는 고주몽의 13대손이지만, 해모수를 기준으로 17대손으로 기록한 것임)에 이르러 18세에 등극하여 호를 '영락'이라 하였으며, 태왕의 은덕이 .....황천에 (이르고)....위엄과 무력이 저 사해에 떨치고....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배 불렀으며 오곡은 풍성하여 백성들이 호태왕이라 칭송하였다...갑인년(서기 414년. 장수태왕 때) 9월 29일 을유<일진>에 산릉으로 옮겨 이에 비를 세워 공훈을 적어 후세에 보이기 위함이니.."
고구려의 기원-부여/동부여에서 망명한 고추모, 골본에서 고리(고려-고구려)를 세우다
[한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제6
(원문)
(해설)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 곳(고리=고려=고구려)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 와 웅심산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239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원문)
(해설)
고리(고려)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고추모 아버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것이다. 불리지(고모수)는 일찌기 서압록강변(서고리강=서요하)을 지나다가 하백녀(강 무역을 하는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정을 통하고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19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동부여)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와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골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고추모가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BC147)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BC146)년에 골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황성이라고도 한다. 황성 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지금의 압록강)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난하 동쪽지역의 한4군)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동명성왕의 원조는 부여5대 단군 고두막이다. 동명성왕은 "동방의 태양으로 성스러운 왕"이란 뜻이다
[삼국사기 13권 고구려본기]동명성왕(추모왕)
시조 동명성왕(추모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동)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