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시절의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는 매 주일마다 며칠 밤 이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다.마오쩌둥도 늘 여기 와서 활동을 지도하고 문제를 생각했다.어떤 때는 밤 11시, 12시까지 회의를 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鄧穎超) 부부는 서로를 동지, 전우라 불렀다.1925년 8월 8일은 그들의 신혼살림이 시작된 날이다. 저우언라이 27세, 덩잉차오 21세,그들은 이미 전업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어느 날,덩잉차오는 그들의 신혼과 혁명사업의 요람이었던 광저우(廣州) 땅을 찾았다.힘들었던 옛날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추억담을 곁들였다.
저와 저우언라이는 매 주일마다 며칠 밤 이 사무실에 와서 회의를 했습니다.마오쩌둥 주석도 늘 여기 와서 활동을 지도하고 문제를 생각했습니다.어떤 때는 밤 11시, 12시까지 쉬지 않고 회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광둥(廣東) 시절,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교유했다는 증언이다.이 증언대로라면 저우와 마오, 두 사람은 50년 이상 중국 공산주의 혁명 사업을 함께 했다는 얘기가 된다.
유럽에서 돌아온 저우는 1924년 9월부터 광둥(廣東) 광시(廣西)지구와 홍콩, 마카오를 아우르는 중국 공산당 양광(兩廣)구 위원장과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엔 부두로 나와 황포군관학교로 가는 배에 올랐고,저녁엔 당 사무실로 돌아와 밤 늦게까지 일에 매달렸다.
저우언라이를 찾아 멀리 톈진에서 배를 타고 광저우로 오는 덩잉차오를 의당 부두에서 맞이해야 할 처지인데도 일에 쫓긴 저우는 대신 사람을 보냈다.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나간 사람은 붐비는 부두에서 덩을 찾지 못했다.덩은 제 발로 걸어서 당 사무실로 왔다. 편지에 적힌 사무실 주소를 물어 물어서.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를 찾아온 셈이 되었지만,덩잉차오의 광둥 행은 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1919년, 5.4운동 시절부터 두 사람은 학생운동을 같이 했다.1920년 11월 7일 저우가 톈진을 떠나 유럽으로 간 뒤에도 틈틈이 소식을 주고받았다.이제 두 사람은 공산당의 동지로 광둥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광저우는 중국 혁명의 요람이었다.쑨원(孫文), 장제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국공(國共)합작의 틀 안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1921년 7월, 이른 바 중공당 창당대회(중공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참석 이래 고향인 후난(湖南)성과 상하이, 광주를 숨 가쁘게 오갔다.
마오는 광주에서 국민당 중앙당 선전부 대리부장과 제6대 농민운동강습소 소장을 지냈다.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가 하는 사실은 그동안 적지 않게 모호했다.책들마다 다 달랐다. 광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사람이 뜻밖으로 많지 않다.
장시(江西) 소비에트 지구에서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상하이의 중공당 지도부에 있던 저우가 장시 소비에트 지구의 마오와 주더에게 지시전문을 보낸 적이 있었다.두 사람이 이 교신을 통해 서로 알게 되었다고 쓴 기록도 있다.
1927년 8월, 남창기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저우언라이와 주더는 각기 부대를 이끌고 광주 지역으로 남하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쫓기는 판이 되자 둘은 헤어졌다.주더는 남은 부대를 이끌고 징강산(井岡山)으로 갔다.마오쩌둥과 주더 두 사람의 만남을 기념하는 ‘회사교(會師橋)’가 정강산 입구에 서있다.
저우언라이는 변장을 하고 가까스로 홍콩으로 빠져나왔다.그는 광동에서 악성 말라리아에 걸려 40도의 고열에 시달렸다. 한때 인사불성이 되었다.남창기의에 함께 참여했던 예팅, 니예룽쩐(聶榮臻)등이 힘겹게 저우를 홍콩으로 빼돌렸다.그는 병을 추스르고 상하이로 갔다.
저우는 상하이의 중공당 지도부에 합류하여 중공당 활동의 전반을 지휘하게 되었다.당시 저우와 마오, 두 사람의 활동과 위치를 개괄한 글이 있다.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처음에는 저우언라이는 중앙에서 지도업무를 했고,마오쩌둥은 지방에서 공산당의 기반을 닦았고, 그 후에는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모두 공산당 중앙에서 일했지만,그때까지도 여전히 저우언라이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리핑(力平)이 쓴 <저우언라이 평전(周恩來一生)>(허우영 옮김, 한얼미디어 발행)에 나오는 대목이다.리핑이 말한 ‘공산당 중앙’은 장시(江西) 중공 소비에트 지구이다.
마오쩌둥과 주더는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정강산을 맡기고 장시성으로 이동하여 중공당 통치구역을 만들었다.장시 소비에트 지구라는 새 둥지의 중심지는 루이진(瑞金)이었다.
저우는 1931년 12월, 상하이에서의 중앙당 지도활동을 접고 장시 소비에트 지구에 합류했다.지난 4년 동안 적지(敵地)인 상하이에서 지하활동만 해오던 저우언라이가 모처럼 마오쩌둥, 주더와 합류, 한솥밥 식구가 되었다.
기록엔 “상하이에서 장시로 갔다.”고 단 한 줄로 되어있다.하지만 그 ‘이동(移動) 경로’는 목숨을 건 험난한 길이었다. 장제스가 지배하는 ‘백구(白區)’를 지나야 했다.상하이의 비밀 아지트에서 몰래 빠져나와 장시의 ‘적구(赤區)’로 스며드는 데에 열흘이 넘게 걸렸다.
곳곳에 장제스의 군대가 있었다. 저우는 변장과 잠행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그는 공산당의 비밀 연락망을 겹겹으로 활용해서 어렵게 소비에트 지구에 안착했다.당시 중국공산당은 ‘적구’ 안에서는 그런 대로 뭉쳐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습격과 공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지만, ‘백구’와는 성격이 달랐다.‘백구’는 기본적으로 사지(死地)였다. ‘백구’ 지역을 통과하는 것은 바로 사선(死線)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지만, 저우언라이 부부는 1928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공당 제6차 당 대회에 참석했다. 그들의 행로 역시 ‘백구’를 통과하는 위험한 여정이었다.그들은 적지(敵地)인 상하이를 몰래 빠져나와 하얼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국민당 군과 일본군이 득실대는 지역을 신분을 감추고 잠행을 했다.
1927년 국공합작이 완전히 박살 난 뒤, 마오는 주로 ‘적구‘ 안에서 활동했다.마오는 주더와 더불어 징강산과 장시 소비에트 지구에 공산당 통치구역을 만들어 농민 게릴라를 주도했다.1927년 8월, 난창봉기가 실패하자 저우언라이는 광동,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앙당 지도업무를 다시 맡았다. 험하고 고된 지하활동이었다.
한편 난창봉기 한 달 뒤인 9월 추수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마오는 잔여부대를 이끌고 바로 징강산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장시 소비에트 지구와 중화 소비에트 임시공화국을 선포하고 주석이 되었다.
저우는 1931년 소비에트 지구에 가기까지 상하이를 중심으로 당 지도사업 말고도 군사 봉기,노동자 봉기를 주도했다.군사위원회 안에 당 최초로 특과(特科)를 만들어 당의 보위업무를 주관했다.
1928년 여름엔 제6차 모스크바 중공당 대회에 참석,대회 주석단(主席團) 위원과 대회 비서장을 맡았다. 뒤이어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상무위원회 비서장 겸 중앙 조직부장이 되었다.11월 상하이로 돌아온 뒤 그는 중앙당 지도업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당시 코민테른의 주제는 ‘노동자화’였다. 그런 바람을 타고 노동자 출신인 샹중파(向忠發)가 중앙정치국 주석이 되었으나 그는 함량 부족이었다. 뒤에 샹중파는 공산당을 배신했다.당시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모든 정책 결정은, 공산당 원로 리웨이한(李維漢)이 회고한 대로 “사실상 저우언라이와 리리싼(李立三)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옌안에 정착하고 나서도 그는 1936년 12월 시안사변 이후 국공협상 일로 적지인 시안을 드나들었다.어렵사리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곤 하지만, ‘장제스 통치구역’인 충칭에서의 공산당 사업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항일전쟁에선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곤 하지만 양당의 신경전과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일본군의 공습에
혁명을 구상하고 있는 1937년 42세때의 모택동 모처럼 한 식구가 되었지만, 앞에서 리핑이 말한 대로, 저우언라이의 위상이 마오쩌둥을 앞질렀다.저우언라이는 곧바로 중앙 소비에트 지구 중앙국 서기에 임명되었다.이듬해인 1932년 10월엔 홍(紅) 제1방면군 총 정치위원, 1933년 5월엔 중국 공농(工農)홍군 총 정치위원이 되어 주더와 더불어 홍군을 지휘하게 되었다.중화 소비에트 임시공화국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등 직위를 거치며 군사, 정치 양 방면에서 지도역할을 했다.
알기 쉽게 말해, 마오는 저우가 오면서, 그동안 다져온 중요한 활동영역을 저우에게 몽땅 넘겨준 모양새가 되었다. 1934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저우언라이는 실질적인 홍군 지도자로 장정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마오는 불행히도 실권을 다 놓친 채로 병중에 있었다.당시 중공당 지도부는 장정 참가를 두고 신경들이 예민해 있었다.누가 참여하고 누가 남느냐, 개인의 생명은 물론 향후 당내 위상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어떤 기록은, 저우언라이가, 외따로 쳐져있던 마오에게 장정 사실을 알려주고 참여의 길을 터주었다고 적고 있다.헤리슨 솔즈베리는 장정이 시작될 무렵의 마오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적고 있다.
1934년 가을, 마오쩌둥은 40세였다. 움푹 패인 볼, 수척한 몸,거의 어깨까지 늘어진 뻣뻣한 검은 머리카락, 힘없는 모습, 불타는 듯한 두 눈,튀어나온 광대뼈 등은 고통의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그는 희귀성 말라리아로 벌써 몇 달째 앓고 있었으며,선교사 교육을 받은 주치의 넬슨 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장정을 떠날 무렵, 마오는 철저히 당 중앙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기회주의”, “협소한 경험론”으로 비판을 받은 마오는 부인 허즈쩐과 경호원 13명만 데리고 루이진 동쪽 20여리 떨어진 산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괴롭고 힘든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외로움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책 상자 하나, 부러진 우산, 담요 두 장, 낡은 외투, 마오쩌둥의 휴대품들이었다.10월 8일 오후 늦게 그는 북문 가까이 있는 그의 집에서, 막 출발하는 홍군과 뒤늦게 합류했다.
저우언라이마저 철저하게 마오를 홀대하거나 외면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중국 현대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장정 이전의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는 엇비슷한 증언과 기록들이 많다.헤리슨 솔즈베리도 <대장정(大長征 Long March)>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쭌이(遵義)회의 전까지만 해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라이벌 관계였다.저우는 1931년 12월에 중앙 소비에트 지구에 도착해,그동안 마오가 차지하고 있었던 중공당 중앙서기처 서기 자리를 맡았다.그 뒤 1932년 10월 닝뚜 회의에서는 마오를 대신해서 제1방면군 총 정치위원이 되었다.
마오의 지위격하를 저우가 반대했으며 그를 옹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는 회의 결정에 따라 1933년 5월에 공농홍군 총 정치위원이 되었다.당시의 그는 보구(博古), 브라운과 더불어 3두 지휘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닝뚜 회의가 끝나고 마오가 홍군 지휘권을 잃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홍군이 닝뚜에 주둔했을 때 마오는 병들어 있었고, ‘휴식해야 한다.’는 의사의 주의를 받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격하와 지휘권 상실에 대해 반대했으면서도 결국은 당의 방침에 순응하여 마오가 맡고 있었던 지도권을 이어받았다.마오의 역할과 위상을 두고 전방과 후방 지도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이 과정에서 저우는 실제로 마오를 많이 감쌌다.
저우언라이는 주더, 왕쟈상(王稼祥) 등 군사최고회의 멤버들과 뜻을 같이해 마오를 전방 지휘부에 두려고 했다. 반면 런비스(任弼時), 덩파(鄧發) 등 중공 소비에트 중앙국은 마오가 후방에서 중앙정부 일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간신히 저우의 고집으로 마오가 홍 1방면군 총 정치위원이 되었으나 다시 뒤집혔다.
저우는 고민 끝에 절충안을 마련했다.마오가 잠시 병가(病暇)를 얻어 휴식을 취하고 필요할 때 전방에 나가도록 했다.저우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마오를 구했고, 그의 길을 터주었다.
저우와 마오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그러면서도 저우는 마오의 지도력과 군사적 식견과 안목을 평가했다. 저우는 남달리 규율과 규칙, 당의 결정에 대해서는 꼭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결벽성을 갖고 있었다.저우는 마음에 안 드는 당의 결정에 대해서도 대체로 이해하고 순응하려고 애썼다.헤리슨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간결하게 적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 달리 당의 결정을 존중했다.마오는 어떤 결정이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자기주장이 낫다는 걸 남에게 주지시키려고 애썼다.대장정이 시작되기 전과 뒤에도 그랬다. 저우도 경우에 따라선 반대를 했다.1943년 여름, 중앙 소비에트 지구에서 보구, 브라운과 맞선 적이 있었다.저우는 포위돌파를 주장했었다.
광주에서 농민운동강습소 소장 일을 보던 마오가 중공당 광둥구당에 안 들렸을 리가 없다.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인 저우언라이가 마오가 책임자로 있는 농민운동강습소에서 특강을 하며 교유했다고 보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런 사정을 덩잉차오가 확실하게 증언했다.당시만 해도 다섯 살 터울인 마오와 저우 두 사람이 깊은 속내를 나누는 사이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로의 인품과 능력을 충분히 저울질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때의 신뢰와 상호의존 관계가 발전한 것이 1935년 쭌이 회의였다.이후 두 사람은, 마오가 저우를 안고, 저우가 마오를 앞세워 중공당의 성공신화를 만들어나가는 새로운 길에 나서게 된다.
저우언라이는 농민강습소에서 “군 운동과 농민 운동”등의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저우언라이는 외교와 협상의 고수(高手)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군사와 특무(特務) 방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저우와 마오는 중국혁명에 있어서 군사력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추구한 점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
저우언라이는 일찍이 유럽에서 공산혁명에 눈뜨기 시작하면서부터 혁명과 군대를 하나로 묶어서 추진했다. 혁명에 심취하면 할수록 그는 군사노선을 더욱더 추구했다.“군대가 없으면 혁명도 없다.”는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지지했다.저우는 중공당 유럽 지부에 참여하면서 ‘군사부’를 만들었다.이는 당시 국내 공산당에서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저우언라이 하면 외교와 협상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는 외교와 군사를 따로 보지 않았다.그에게 군사와 외교는 손바닥의 앞뒤였다.현대의 국방외교 이론을 그는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당내에서 그의 활동 본령(本領)도 군사지휘였다. 장정(長征) 앞뒤가 그랬고,1945년, 항일전 승리와 건국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정치국 위원 5명에게 주어진 역할 분담에서도 그는 마오쩌둥과 더불어 군사지휘를 맡았다. 주더, 류사오치, 런비스 세 사람에겐 각각 당 감찰공작, 당무와 백구 활동, 토지개혁 공작 등이 맡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