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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이처럼 단순한 기록을 남긴 왕도 있다.
惠王의 이름은 季이며 明王의 둘째아들이다. 昌王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년(599)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惠라고 했다.
말하자면 왕이 된 그 즉시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무런 치적도 패악도 남길 새 없었다.
깨끗하다. 백제 제 28대 왕.
시인 이시영의 <史記에서>라는 시다.『삼국사기』를 읽고 쓴 시인데, 백제 제28대 왕의 기록을 사기 기록 그대로 보여준다. 그 왕은 왕위에 오른 즉시 세상을 떠나 아무런 치적도 패악도 남기지 않은 깨끗한 왕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흔히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자들은 세상에 자기의 치적을 남기고자 과욕을 부리는데, 특히 독재본능이 내재된 권력자일수록 그 치적과 질서를 조장하기 위해 각종 억압과 착취의 행위를 일삼기 마련이다. 그런 지배자들에게 왜곡되어 민중들의 고통만이 가중되어 온 우리 현대사에서 이 시는 그 지배자들에 대한 통렬한 일갈이라 보여 필자는 이 시를 빌려왔다.
이제 우리 역사에서 더 이상 오만과 독선으로 자신의 치적을 위해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독재자가 등장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역사에는 가끔 전례가 되풀이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지금 우리는 이 아이러니를 체험하고 있다. 온 나라를 독선과 오만으로 도배질하는 MB와 그에게 기생해 한 세월 영화를 맛보려는 인물과 집단들의 준동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란 원래 권력을 빼앗아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행위라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 우리 근 현대사가 낳은 권력자의 대부분은 이상을 빙자해 승자의 특권을 철저히 누리는 탐욕을 앞세웠다. 그 계보는 MB로 이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어준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어땠는가. 민주주의 후퇴, 독재 망령 부활, 전 국토의 콘크리트화, 공안통치 부활, 은폐 조작 정치 등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가슴이 꽉 막힐 지경이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4대강 개발>은 녹색성장이라는 탈을 쓰고 통계를 교묘히 조작하거나 감추기, 떠넘기기 등으로 신뢰를 버렸고, 희대의 악법 <미디어관련법>은 희한한 궤변을 개발(?)해 유효로 판결했고, <세종시 건설계획>은 합의한 특별법까지 뒤집을 요량이다.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이 국민 여론과는 상관없이 MB의 의지대로 강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MB의 의지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있다. 여론은 반대의견이 더 많다. 결국 MB가 국민의 의사에 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MB는 추진의 전도사를 내세우고 자신은 한발 물러서 있다. 그 방법도 교묘하다. 말을 바꾸거나 ‘양심’ 또는 ‘선진화’를 운운하며 자신의 의지가 옳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MB는 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을 들어 <4대강 개발>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보면 추정할 수 있다. 강산이 수십 번이나 변한 오래전의 국토개발 논리를 끌고 와 억지로 꿰맞추는 것으로 보아 <4대강 개발>이 얼마나 부실하게 추진되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MB는 ‘백년대계’를 앞세우지만 어느 모로 보거나 정책과 국책사업에 백년대계의 진중함이 보이지 않는다. 남은 임기동안 무엇이라도 만들어내야 자신이 산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하다. 틀린 주장일까. 출범 초부터 ‘거짓말’로 낙인찍힌 MB는 집권 후반기에 심각한 레임덕에 빠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반환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각종 대형 ‘게이트’가 터질 위험성은 어느 정권보다도 높다. 그러므로 설령 사상누각일지라도 근사한 업적 한방이 절대적이다. 표심을 잡기위한 임시 블랙홀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라도 없으면 임기 내내 덮고, 가리고, 감추고, 말 바꾼 거짓말은 치명적이다. 또 거짓말을 상쇄할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절박하다. 전직 대통령에게 가한 벌로 보아 정권 재창출은 더 절박하다.
MB는 ‘능력’이라는 상표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거짓’이 되고 말았다. ‘짝퉁’이었던 셈이다. 어차피 ‘짝퉁’과 적당히 야합한 국민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한다.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요즘 시중에 MB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패러디성 주문이 유행하더니 노래까지 등장했다. 정답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해답이다. 이젠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치른다.
시인의 일갈이 아니라 국민의 일갈로. 부탁이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라. 훗날 한 시인이 시 한편으로 위로해 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