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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칼바람보다도 매섭고 차가웠던 경기불황 사태가 온 나라를 휘감았던 지난 1998년, 소위 IMF 실직자와 노숙자가 거리를 메웠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살기 어렵고 언제 시련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온정의 손길이 우리 사회 곳곳에 미쳤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그런데 따뜻한 손길의 대부분은 종교계가 베푼 온정이었다. 서울역 앞에 간이 천막을 치고 점심식사를 제공하던 교회와 성당, 부모가 키울 수 없어 버린 아이들을 거두어 준 각 사찰, 경기침체로 봉사의 손길이 뚝 끊긴 시설에 도움을 주던 종교단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살다보면 자신의 형편이 어려운데도 남을 돕고 사회를 위해 애쓰는 이들을 간혹 만나는데 대부분 종교인들이다. 불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그 어떤 종교든 교리와 교파를 떠나 이렇듯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종교는 모두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각박할수록, 그래도 우리 인간 사회에 종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란 우리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신의 존재를 잊기 쉽다. 옛날 농사를 짓고 살던 우리 조상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날씨에 따라 한해 농사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에 대고 기우제를 지내고, 홍수가 날 때는 날씨를 맑게 해달라는 기청제로 기원했다. 오직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미리 날씨를 예상할 수 있는 기상관측이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하늘의 뜻’ 보다는 ‘과학의 편리성’ 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의 발달과 종교에 대한 관심이 완전하게 반비례하는 건 아니다. 21세기, 지금 세계의 첨단 과학은 어디까지 와 있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로 미리 질병을 예측해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느니 ‘인간복제’를 허용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시작되고 있는 시대다. 그야말로 과학의 발전이 극에 달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인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아주 많으며 전쟁의 공포는 늘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오히려 사회가 현대화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더 불안하고 ‘나는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의 위기를 더 크게 느낀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더라도 종교는 종교대로 그 영역이 줄어들지 않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첨단과학의 발전과 정체성의 위기가 공존하는 21세기에, 과학과 종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종교란 [신이나 절대자를 인정하여 일정한 양식 아래 그것을 믿고, 숭배하고, 받듦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고자 하는 정신문화의 한 체계] 라고 나와 있다. ‘종교(宗敎)’ 라는 한자에 담긴 의미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종교를 'religion‘ 이라고 하는데 "다시 연결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종교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완전한 신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 고통과 질병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종교의 기능이라면 궁극적으로는 과학의 기능과 같은 것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우주, 지구, 생명체 등 자연현상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학문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규명된 원리를 이용해서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게 과학기술이라면 결국 과학과 신앙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더 많다고 본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는 완전히 별개이거나 심지어는 적대적인 관계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앞으로는 과학자와 종교인이 서로를 배척하면서 ‘자기만의 길’ 만을 갈 것이 아니라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 결국 과학이란 신의 뜻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주신 보물 상자의 열쇠를 하나씩 열어 가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늘에 계신 신께서는 우리 인류가 이룩해 놓은 과학의 발전상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실지도 모른다. 점점 당신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다고 좋아하고 계실지 모른다는 거다. 무조건 첨단과학의 발전상을 두고 신에 대한 도전이라 하면서 무조건 흐르려는 물줄기를 거스르는 것보다는, 문제점이 있다면 하나하나 개선시켜 나가면서 지금의 과학발달을 막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류에 공헌하는 바가 훨씬 더 많은 과학의 발전이 종교를 부인하는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또한 신의 존재를 무시한 채, 오직 이 세상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와 주장으로만 일관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창조론만을, 과학자는 진화론만을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이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가 함께 상생의 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류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정호선/공학박사, 전 경북대 전자공학과 교수, 15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