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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은 부여 5대 단군 고두막. 백제 시조 구태는 고두막 후손.동부여는 해모수 왕조
[한단고기-북부여 상]에서 기록하기를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적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을해 3년 (고두막)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 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고두막)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동부여 왕)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한단고기]기록을 통하여 동명이란 인물은 부여를 침략한 한나라를 크게 물리친 고두막이란 사람이고, 해모수 왕조를 연해주지역으로 보내고,부여 5대 단군에 직위한 고두막이 동명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고두막의 후손이 부여왕의 아들로 백제를 세운 시조 구태임을 [북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가 한강지역에 세운 나라는 '십제'다.
십제는 205년경에 구태 백제에 의해 통합되어 왕통이 구태왕통으로 바뀌게 된다. 십제와 백제는 조상이 소서노의 할아버지가 되는 부여 동명왕으로 동일하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한성백제를 '백잔'으로 비하하여 기록하였고, 웅진백제를 '이잔'으로 비하하여 기록하였다.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서해를 따라 웅진의 백제(이잔국)을 정벌한 이유도 웅진이 백제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즉, 지나사서 [북사]와 [수서]에 "동명의 후예(부여 동명왕의 후손) 구태(부여왕)가 대방고지( 帶方故地 대방의 옛 땅) 에 나라를 세워 동이강국(백제)이 되었다고 하였다."라고 기록한 내용이 그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로 본 동부여의 위치
東海之濱有地 號曰 迦葉原 土壤 膏유宣五穀 來都也 아란불 遂勸王 移都於彼 國號 東夫餘
해설/"
동해 바닷가 나뭇잎으로 하늘을 가리우는 곳에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되는 곳이 있으니 아란불은 왕(해부루)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지를 옮겨 나라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한나라를 크게 물리치고 부여민심을 얻은 고두막(부여 동명왕)이 단군에 오르자, 해모수의 손자로 당시 부여의 단군이였던 해부루가 단군직을 고두막에게 양위하고 부여의 제후가 되겠다면 부여 동쪽지역에 세운 나라가 바로 가섭원 부여, 즉 동부여다.
따라서 부여가 난하 동쪽지역에 위치한 전한4군 중에 현도군으로부터 북쪽 1천라고 했으니 길림지역이다. 따라서 부여의 동쪽지역에 있기 때문에 동부여인 만큼 동쪽으로 바닷가와 접하고 농사가 잘 되는 지역에 동부여가 있다고 했으니 정확히 연해주지역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전 / 부여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군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몽골 오논강-흑룡강-아무르강->오츠크해)가 있다. 사방 2천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다.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즉위연호)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조공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부여왕이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후하게 답례했다. 이때부터 사절이 해마다 통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기(步騎)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침략해 그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그 후에 다시 귀부(歸附)했다.
영녕(永寧) 원년(120년), 부여왕이 장자
위구태(尉仇台)를 파견해 대궐로 나아가 조공하자 천자(天子)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 비단을 하사했다.
순제 영화(永和) 원년(136년), 부여왕이 경사(京師)에 내조(來朝)하자 황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궁중음악의 일종)와 각저희(角抵戲)를 베풀었다.
환제 연희(延熹) 4년(161년), 사신을 보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永康) 원년(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을 이끌고 현도를 침략했는데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 희평(熹平) 3년(174년), 다시 봉장(奉章)하여 조공했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했는데 헌제 때 부여왕이 요동(군)에 속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끝]
부여가 후한의 요동군에 속할 때 부여왕의 아들 구태가 요동태수 공손강의 딸과 혼인하여 혈연.군사적 동맹을 강화한다. 고구려가 후한과 부여의 공동의 적이였기 때문이다.그리고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바다를 건너 황해도지역에 대방군을 설치할 때 구태도 함께 요동지역에서 100가족을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 대방땅에서 백제개국을 선포하고 서해를 따라 마한땅 웅진(공주)에 도읍하고 성과 궁궐을 지었다.
한성백제가 망한 후에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가 바로 백제의 본거지가 웅진이였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한성백제를 '백잔'으로 비하하여 기록했고, 웅진백제를 '이잔'으로 비하하여 기록하였다.광개토태왕이 수군을 이끌고 이잔을 정벌한 배경자체도 웅진이 백제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요동태수 공손강은 황해도 지역에 대방군을 설치하고 후한의 간섭에서 벗어 나고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백제 책계왕은 이 대방태수의 딸 보과와 혼인하여 왕비로 삼았다. 두 나라가 혈연적으로 친척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미천태왕이 북한 지역의 후한군현을 회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