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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천지 원수 모용선비왕조를 응징하여 멸망시켜 버린 광개토태왕의 권선징악 정신
2세기 이후 한나라와 연합하여 흉노족을 멸하고 초원의 주인이 된 선비족 중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국호를 <연>으로 삼은 모용선비족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도굴하고 황후(고국원태왕 부인)와 태후(고국원태왕 어머니)를 인질로 끌고 간 전연이였다.
전연은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망한 후에 연나라 왕족이 선비족으로 망명하여 모용선비의 왕족이 된 지나세력이다. 전연은 지나대륙을 통일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굴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였던 고국원태왕은 전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방어전략을 구상했는데, 험준한 남부전선에는 1만으로 고국원태왕이 직접 방어하고 쉽게 침략할 수 있는 북부전선은 고국원태왕의 동생 고무가 방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선비의 왕 모용황은 고구려의 방어전략을 깨고 대군을 이끌고 남부전선으로 들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고국원태왕은 환도산성으로 들어가 방어를 했으나, 국내성이 쑥대밭이 되어 모용선비족에게 짓밟혔던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서 최고의 굴욕이였고 패배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끌려 간 황후와 태후를 데려 오기 위해 조공을 바치고 머리를 숙였어야 했다.
아내와 어머니를 적국에게 빼앗긴 고국원태왕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고국원태왕도 백제의 침략을 방어하다가 결국 지금의 북한 평양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후 내부를 수습하고 힘을 길러야 했다. 고국원태왕의 아들 소수림태왕은 법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부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소수림태왕의 동생 고국양태왕에 이르러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태왕이 등장하게 되니 18세에 태왕에 즉위하였던 고국양태왕의 아들 고담덕이다. 광개토태왕은 영토를 많이 넓힌 고구려의 태왕으로 그 업적은 세계 최대 비석문인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 기록하여 1만년이 지나도 후손들이 태왕의 무덤과 비를 지키고 그 기상을 되새기게 하였다.
광개토태왕비문에서 해석의 논란이 있는 부분이 영락17년조 기록이다.
아래는 광개토태왕릉비 영락 17년조 기사이다.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 佳城), 성( 城)을 파하였다."
비문 17년 기록은 5만명의 군대로 적을 물리쳐 적으로부터 획득한 갑옷이 1만여 벌에 이르는 등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이 빼앗았다는 대승 기록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광개토태왕 기사를 보면 의미심장한 기록이 보인다.
"17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예(禮)를 베푸니, 북연왕 고운(雲:高雲)도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고운의 조부는 고화(高和)로 고구려의 유민이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했기 때문에 고(高)로 씨를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太子)였을 때 운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7년조
광개토태왕 17년인 407년은 후연이 멸망하고, 북연이 들어선 해이다. 후연의 멸망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
영락 17년(407) 기사는 후연과의 전쟁 기사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고구려가 402년과 404년 후연을 공격한 것이다.
"11년에 왕이 군사를 보내어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치니 후연(後燕)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城)을 버리고 달아 났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1년 조
후연의 숙군성에 대한 공격 성공으로 고구려는 신성, 남소 2성을 되찾았다. 그런데 숙군성을 평주자사가 다스렸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고구려가 숙군성을 차지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하를 건너 오늘날의 조양(朝陽) 부근까지 진격했다는 뜻이다. 평주자사 모용귀가 숙군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기록은 숙군성을 고구려가 장악하였다는 뜻이 된다.
지나사서 『진서』권124 「모용희재기」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그 때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침구(侵寇)하여 1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진서』권124 「모용희재기」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시기는 광개토태왕 14년인 서기 404년이다.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어딘가? 지배선 교수는 『중국역사지도집-동진16국 · 남북조시대』라는 역사부도집을 근거로, 연군은 오늘날 북경이라 한다. (윤병모는 『신당서』의 「지리지」의 "영주 동쪽 180리에 연군성이 있다"는 구절로 대릉하와 세하의 합류지점인 요녕성 의현 동남일대라 비정하고 있다.)
『진서』의 기록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후연의 중심부인 북경까지 공략했다는 소중한 기록이다.
우리측 기록인 『삼국사기』역시 고구려의 연군침공의 가능성을 전하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13년 11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후연(後燕)을 침범하였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3년 조
401년 광개토태왕이 후연 숙군성을 장악한 여세로 후연 내지로 밀고 들어 갔다는 기사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후연의 어느 지역을 공격하였다는 언급이 없다. 지나사서인『자치통감』은 404년 12월에 "고구려가 후연(後燕)을 침략하였다."는 기록을 전하는데 『삼국사기』와 시기상으로 1년 오차가 있을 뿐 내용은 동일하다.
이 때의 사정을 『진서』모용희재기는 "그 때 고구려가 연군을 침략하여 백여 인을 살육하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고구려의 연군침략이 지나사가 입장에서 너무 치욕적이었기 때문에 사마광은 고구려의 연군침략기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비문의 17년조 정벌 대상은 후연이고, 402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후연에 대한 줄기찬 공세로, 영락 17년인 407년 후연은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멸망하고, 그 자리에 고구려 제후국 북연이 들어 서게 되는 것이다.
후연이 망하고 고운이 북연의 새 왕으로 등극한 것도 고운이 고구려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7년조 기사를 보자.
"17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예(禮)를 베푸니, 북연왕 운(雲:高雲)도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태왕 17년조
광개토태왕비문에도 <천제지자>라는 용어가 기록되어 있듯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태왕가는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여기며, 시조인 추모성왕과 하늘(天)을 혈연관계로 연결시켜, 하늘에 대한 정통성을 내세웠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북연왕 고운에 대한 단순한 동족대우가 아니라, 하늘을 정점으로 한 고구려의 천통으로서, 광개토태왕을 하늘의 직계로, 고운을 방계로 삼은 것이라 봐야 한다. 즉, 관념적으로 고구려 태왕가(太王家) 밑에 북연의 고운 왕가(王家)가 위치한 것이고, 북연이 고구려의 제후국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서영수 교수는 광개토태왕이 북연왕 고운에게 종족(宗族)의 예를 베풀었다는 기사는 주나라 종법질서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 고구려가 대종(大宗), 북연이 소종(小宗)이 되는 관계로, 천자가 제후를 통제하던 주나라 종법적 봉건질서를 고구려가 동방에 구현하여 고구려가 북연을 신하국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장수태왕 23년(436), 북위의 침공으로 북연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한 건, 고구려가 북연의 상국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