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래 전 의원 정동영은 나쁜 놈이다? 대선에서 패한 그를 두고 세상과 사람들은 그들 정치인은 커녕 사람 취급을 하려하지 않았다. 2007년 대선 패배의 모든 책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져야 했다. 당시의 당지지율은 상관이 없었고 오로지 대선패배의 처음과 끝은 정동영 후보였다.
그가 2000년 쇄신정풍운동을 주도했던 용감한 업적도 2002년 대통령 경선당시 줄줄이 사퇴하는 다른 후보와 달리 노무현 후보와 아름다운 경선을 했던 일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노무현 후보를 흔들어대던 후단협을 물리치고 희망돼지 저금통을 들고 전국에서 노무현을 외쳤던 그의 모습도 온데 간 데 없어졌다. 통일부 장관으로 김정일 위원장과 5시간 동안 회담을 통해 남북철도 연결도 개성공단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대선 패배후 그는 심지어 당권의 동심원에서 사라졌다. 대선 후보였던 그는 국회의원 지역구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고 그의 측근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했다.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동작(을)구도 한나라당이 파견한 저격수에 의해 장렬히 전사당하고 말았다. 그는 오도가도 못하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었다.
대선 패배, 총선 패배 후 그는 정치적 망명을 하다시피 짐을 싸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미국 월가의 한복판에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금융위기를 두 눈으로 목격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 발생한 전주 덕진 보궐선거에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나는 지금도 잘못된 판단과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대선후보였던 그를 아예 공천배제한 처사도 그리 온당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선이 되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그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국회의원은 없었고 오히려 정동영과 친하다는 소문이 날까봐 두려워 멀리 했다. 한때 열린우리당 시절 정동영계가 80여명의 국회의원이란 말은 폐허가 된 로마제국의 찢어진 역사책의 기록이었다.
노무현대통령 서거 당시 그는 배신자로 낙인 찍혀 봉하마을에서 멱살까지 잡히며 조문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시청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도 그에게 조문의 자리를 권하는 사람도 없었고 흰장갑을 갖다 주는 당직자도 없었다. 내가 끼었던 흰장갑을 벗어주고 “그래도 앞자리에 나가 조문을 하시라”는 말을 하며 내가 등을 떠밀자 쓸쓸히 앞으로 걸어 나가던 기억이 애처롭다.
밤 12시에 혼자 차를 몰고 봉하마을에 가서 꺼억꺼억 울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최근에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게시판에 1년 가까이 묘지를 지켰던 분이 글을 썼다. 아무도 없는 밤시간에 혼자 두 번씩이나 스스로 차를 몰고 와 참배를 하고 울고 갔던 사실을 글로 썼다. 글을 쓴 분도 처음에는 설마 정동영일까? 했다고 눈을 의심했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가슴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랬을까? 나는 아직도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투쟁에 나선 정동영 상임고문
탈당을 하고 전부 무소속 출마를 하며 그는 복당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당의 싸늘한 요구만 펄럭였다. 그는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무릎 꿇고 반성하고 있는 그의 머리통을 때리며 진정성이 없으니 더욱 반성하라는 힐난만 있었을 뿐 언제 복당심사를 하겠다는 언사는 없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 당의장으로 공천장을 주었던 한때 정동영계 의원들한테 걸핏하면 두들겨 맞았다. 정동영에 대한 모욕주기, 왕따돌림, 걸핏하면 들이대는 진정성 테스트 시험지에 정동영은 정답을 쓰고 또 썼지만 못 믿겠다는 통보뿐이었다. 당시 지도부를 에워싸고 있던 완장맨들의 정동영 이지메는 정말 눈뜨고 못 볼 일이었다.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정동영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당에서 어느 누구하나 나서서 정동영의 복당을 자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탈당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복당도 마치 해당행위처럼 취급을 받았고 그는 한 때 동료들이었던 좌석에 앉지 못하고 국회 본회의장 한쪽 귀퉁이 무소속 좌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 했다. 당시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는 천신만고 끝에 복당을 했지만 이미 그는 돌아온 탕자였지 당에서 그의 옛날의 명성은 오히려 그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의 복당은 6.2 지방선거 공천이 다 끝났을 때 이루어졌기에 지방선거에서 그의 역할을 사실상 없었다. 나는 기억한다. 그가 지원유세를 할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오지 말라고 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그는 유세본부장이었던 내가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사회를 보았기에 딱 한번 간신히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TV 화면에 잡히는 어떤 지원유세도 할 수 없었다. 정동영 따돌리기는 민주당안의 스포츠 경기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는 오지 말라는 손사래를 못본척 하고 열심히 지원유세를 다녔다. 지원요청이 없는 자발적 유세였다.
그는 복당 후 장문의 반성문을 발표했다. 자신의 무능과 잘못된 판단에 대한 회고, 그리고 정치적 혜안과 통찰력이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열린우리당 시절 우왕좌왕했던 자신의 과오도 인정했다. 노무현대통령이 시도했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도 솔직히 용기가 부족해서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 반성문에도 진정이 있다 없다를 놓고 갑론을박했다.
그리고 그는 용산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용산 참사 현장에 갔을 때도 “왜왔냐?”는 핀잔부터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야유와 핀잔 속에서도 진정 자신이 여태껏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가슴 뭉클한 불덩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대선 패배 후 자신의 진로만 고민했던 그가 자신의 패배가 이런 살상의 재앙을 불어 왔구나! 하는 깊은 반성을 불러 왔다고 술회한 바 있다.
정동영은 용산참사의 희생을 딛고 다시 태어난 투사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변신을 변장술로 매도당했다. 매일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미사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대형 미사든 소형미사든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미사에 거의 결근으로 참석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진짜 그랬다.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일찌감치 그의 진정성을 인정했고 정동영을 신뢰하는 관계가 되었다. 용산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도 아마 제일 먼저 가족들을 모시고 식사하며 위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용산참사의 현장에는 자주 갔지만 그것을 그의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달려간 곳이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이다. 그는 집요하리만큼 한진중공업에 올인했다. 언론에는 적어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언론에 나오지 않는 유성기업에도 자주 내려갔고 쌍용차 현장에도 자주 나타났다. 언론에서 그가 사라졌지만 노동의 현장, 집회의 현장에는 민주노동당 의원이 되어 개근 출현하였다. 그를 만나려면 집회의 현장으로 가면 쉽게 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동영의 이런 실천행위는 쇼라고 매도되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도 정동영은 “쇼하러 왔군.”이란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도 그는 그저 연기를 잘하는 영화배우 정도로 취급당했다. 이때부터 인터넷에서는 그의 진정성을 인정해주자 말자는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진중공업 청문회 때 울먹이며 “이 사람을 아느냐?”는 그의 절규에도 그의 눈물조차 의심하는 세상인심을 보며 참으로 그가 쓸쓸하고 측은했다. 그는 100점을 맞아도 낙제였다.
사실 그는 2010년 10월 3일 전당대회에서 당의 강령에 당원주권 조항과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보편적 복지를 명문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하고자 했던 보편적 복지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언감생심 당의 견제 속에 맡지 못했다. 당을 좌 클릭하는데 선봉에 섰지만 그는 그것을 실천할 기구에는 이런 저런 견제로 빙빙 외곽을 전전했다.
진보의 배낭을 메고 왼쪽으로 행군하라. 이것이 그의 반성의 결과물이다. 한진중공업을 매듭짓자마자 그는 한-미 FTA 폐기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민주당은 처음부터 페기 당론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동영이 나서서 민주당내 관료출신들의 한-미 FTA 보충론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런 그의 진보개혁 행동이 이번에는 당 안에서는 돌출행위자로 찍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당을 왼쪽으로 행군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노동현장에 열심히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다시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애써 외면했다. “정동영 너 아무리 그래봐라 우리가 믿을 줄 알아” 마치 서로 인내력 테스트하는 것처럼 그는 열심히 투사가 되어 갔고 그를 냉소하는 사람들은 또 집요하게 그를 불인정했다.
“의원님! DY 여기 영도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면 안 돼요?” 나는 뜻밖에도 한진중공업 피해 가족의 한사람으로부터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말을 들었다. 정동영이 처음으로 물대포를 맞던 날 그날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 아니 심지어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간부였던 한 분이 정동영을 붙잡고 다음번 선거에는 자신이 마이크를 잡고 ‘정동영 지지발언’을 하겠다며 고마워했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렸던 복지국가 국민운동본부 발대식에 참석했던 한진중 가족대책위 회장은 발언을 통해 “고마우신 정동영의원님이 초청했으니까 올라왔지 다른 분이오라고 했으면 오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이미 정동영은 가족대책위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정치권은 언론은 애써 그을 외면했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달랐다.
이런 현상은 한-미 FTA 집회 현장에서도 똑 같았다. 민주당 다른 의원이 마이크를 잡으면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정동영이 마이크를 잡으면 환호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참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SNS에서 서서히 그의 진정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정봉주의원도 나꼼수에서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정동영을 다 떠나고 거의 빈집 지키는 듯 했던 나로서는 솔직히 기뻤다.
빨리 본론과 결론을 말해야겠다. 정동영이 전주 불출마를 선언했다. 나는 예전부터 혼자 이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물대포를 맞던 2차 희망버스 때 “영도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면 안 돼요?”라고 했던 그 말이 자꾸 귓전을 때렸다. 아! 그것도 방법이고 길이겠구나!하고 생각을 했고 오랫동안 그 생각을 가다듬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내 생각을 혼자 다듬기를 몇 개월을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다.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관철시켰다. “금배지에 연연하지 말고 전주를 빠져 나와라. 재벌개혁을 해야 보편적 복지도 할수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진중공업을 해결한 장본인으로서 영도에 가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자”고 주장했다. 나는 이 길이 죽든 살든 2~3년간 정동영이 해 왔던 실천행위의 종결점이라 생각했다. 그가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