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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초전대패,전쟁의 참화 자초 고통준 이승만정권
정부수립이후 남북 분단으로 인한 군사적 대치 상황하에서 남북간에는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이러한 남북간 군사적 분쟁 과정에서 북한의 도발을 철저히 응징하고 한편으로는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한의 무력도발을 최소화시킨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달리 군을 정권 안보기반으로 하면서 반공과 국가안보를 정권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던 보수정권은 오히려 전쟁을 자초하고 무장공비 침투등 북한의 무력도발을 번번히 허용하는 경계실패로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여 국민과 나라를 고통에 빠트렸다.
이승만정권은 군사력 건설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해 북한군에 비해 열세인 상태에서 주제넘게 북진통일을 부르짖어 북한의 군사력 건설을 가속화시켰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본연의 책무인 국방은 내팽개친채 허구헌날 경무대에 들러붙어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시원하시겠습니다, 각하!"한마디 하면 "지당하십니다,각하!"를 연발하면서 눈도장 찍기에 바빴다.
군 총책임자인 일본군 의무 중좌출신의 함량미달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은 당시 보릿고개에 굶주려 깡말랐던 국민과 달리 호의호식하여 무려 100kg에 이르는 비대한 체구를 감당못해 일본군 시절처럼 훈도시만 찬 해괴한 알몸 상태로 집무실에 쳐박혀 졸다가 잠이깨면 경무대를 찾는게 일과였다.
국방 수뇌부가 이처럼 출세와 자리보전에 연연,정치에 집착하고 나태한 근무자세로 일관한 결과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초래하였다.당연히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지 못하고 초전 연전대패끝에 낙동강 전선까지 쫒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수백만의 인명피해와 국토가 초토화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54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미군과 유엔군의 도움으로 3년전쟁을 치른끝에 겨우 국체를 회복할 수 있었다.
북한 대남도발 허용,경계-작전-경제실패 군사보수 정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박정희 군사정권도 북한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등 대남무력 도발을 사전 차단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침투를 허용하여 많은 인적,물적 손실을 입으면서 겨우 소탕하는데 급급하였다. 대표적으로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할때까지 우리 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다행히 나뭇꾼의 신고로 작전을 펼 수 있었다.
당시 소탕전에서 김신조를 생포하고 27명을 사살하였으나 3명은 끝내 놓치고 말았으며 종로 경찰서장을 비롯 다수의 국군 전사자를 내는등 큰 피해를 입었다. 1년뒤인 1968년 10월30-11월2일에도 대규모 무력도발이 있었다.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던 1.21사태 무장공비 소속부대인 북한군 124군부대 무장공비126명이 울산 삼척지구로 침투한 것이다.
또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대침투작전을 편 결과 무장공비 5명생포,2명 자수외에 나머지는 사살하였으나 아군전사 38명,이승복군등 민간인 피살 23명,부상 64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다.그해 12월4일에는 KAL기가 납북 당하는 사건이 터졌고 1970년 6월5일에는 해군함정이 피납되었다. 당시 함정에 승선했던 해군장병 20명은 아직까지 전원 미귀환 상태다.
그해 6.22일에는 국립묘지 현충문 폭발물 설치 사건이 발생하였고 엿새후인 28일에는 영흥도 북방으로 간첩선이 침투하였다. 다행히 군경합동으로 간첩선을 격침시키고 내륙으로 상륙한 6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하긴 하였으나 내륙침투를 허용하는 경계실패라는 허점을 남겼다.
1974.2.15일에는 어선 수원32,33호가 납북되어 선원 33명이 피납된데 이어 81년6월11일 서해에서 어선 제1공영호와 선원 17명,82년 7월13일 동해에서 제5마산호,85년 2월5일 제12광남호와 제2동국호등 어선2척이 납북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신군부의 후견인 역할공로로 3군사령관과 중정부장을 지낸 유모씨가 군단장 시절 전방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군단병력과 공수부대를 투입했지만 작전지역을 휘젓고 다니다가 철책선을 폭파하고 넘어가는것을 보면서도 소탕에 실패한 부끄러운일도 있었다.당시 경계작전 실패는 군단장이 현지에 나와 분대장 소관사항까지 일일이 간섭하면서 작전부대가 독단활용을 못하도록한게 결정적인 작전실패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해외에서도 북한 특수공작원의 공격으로 정부 주요인사등 많은 인명이 희생당하는 대형사건이 연달아 터졌다.1983년10월9일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랑군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도중 북한 특수 공작원이 미리 설치한 폭약을 터트려 수행중이던 서석준 부총리겸 재정경제원 장관,이범석 외무부장관을 포함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87년 11월19일에는 미얀마 근해 상공을 비행중이던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 폭파시켜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김영삼 정권 집권 시기에도 북한 특수부대 침투는 계속되었다.1996년 9울17일 북한 공작원 침투용 잠수함이 강릉시 강동면 해변 암초에 좌초되어 있는것을 발견한 택시기사 신고로 대대적인 군경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지상에 상륙,은신,도주하던 공비25명을 소탕하고 잠수함을 노획하였다. 당시 작전으로 아군도 11명이 전사하고 41명이 부상을 당하는등 인명피해가 컸다.
국가안보 실패 사이비 보수집단 대국민 사죄후 반국가적 왜곡 중단해야
이외에도 전방지역에서의 크고작은 무장공비 침투와 교전사례는 수없이 많다. 박정희정권 이래 김영삼 정권까지 안보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삼을만큼 역대 보수정권들은 반공과 안보 제일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앞에서 열거한 북한 대남 도발 사례에서 보듯 안보 제일주의 정권이 무색할 정도로 거의 대부분 적의 침투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탕작전 또한 시행착오와 도주로 봉쇄실패,전술미숙으로 수많은 장병과 민간인의 희생을 부른끝에 겨우 소탕할 수 있었고 몇몇 공비들은 아군의 차단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복귀하기까지 하였다. 제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은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의 명언을 모르지 않는다면 경계에 실패하여 무장공비 침투를 허용하고 수많은 장병과 민간인 희생자를 내고도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역대 보수,군사정권 관계자와 당시 군에 몸담았던 군간부 출신들은 양심이 있다면 더이상 김대중,노무현정권을 향해 선제 사격을 하지 말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시때문에 제2차 연평해전에서 아군 피해가 컷다느니,안보를 약화시켰다느니,약골 민주군대로 전락시켰다느니 하는 파렴치한 망언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경계와 작전에 실패해 벌어진 전쟁과 공비 소탕전에서 수많은 부하장병과 국민을 희생시키고도 무장공비를 소탕하였다는 부끄러운 공로를 내세워 훈장타고 승진하여 군사정권의 주구노릇에 급급했던 정치군인들,그리고 군사정권에 빌붙어 떡고물 주워먹기에 바빳던 사이비 보수세력들이 어디서 감히 안보를 운운한단 말인가.천상천하 이보다 더한 후안무치함도없을 것이다.
입으로는 국가안보,반공을 떠들면서도 본인을 비롯하여 자식,피붙이들을 가장 많이 군대를 보내지 않은 병역기피,면탈 집단이 사이비 보수 그대들이 아니던가.표리부동한 위선자들 국민적 심판과 천벌을 받아도 부족하다.오히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군출신이 아니었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군의 도발을 최소화하고 도발시에는 강력 응징하는 등 "싸우지 않고 이기는게 최선"이라는 손자병법을 철저하게 실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위 보수를 자처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관계자와 군사정권 추종 군출신들은 이제라도 지난날 진정한 국가안보 보다는 군을 정치에 이용함으로써 국가안보를 약화시켜 한국전쟁의 초전대패를 자초,낙동강 전선까지 쫒겨갔다 미국과 유엔의 지원으로 겨우 국체를 회복한 안보실패와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