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의 광대한 영토를 당나라에 양도한 신라의 3국 통일은 왜곡된 통일론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지 않았다면 신라는 백제.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얼마나 국가가 위기에 처했으면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백제를 칠 생각을 했을 것인가?
중국지역에서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산동지역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들어온 진조선유민들의 사로6촌으로 시작된 신라는 이후 김알지세력과 선비족이 연합하여 박.석씨로 대변되는 진조선유민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모씨에서 김씨로 바꾼 선비족 모진(법흥왕)이후부터 김씨로 성을 바꾼 모씨의 영구집권이 시작되는 것이다.이들 선비족이 선비족의 나라인 당나라와 손을 잡을 수 없는 혈통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빨리 알아 차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중국지역과 아시아 바다를 장악하며 아시아 최강을 자랑한 부여족의 시대를 활짝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신라를 항상 약소국으로 앝잡아 보다가 뒷통수를 당하고 거대한 고구려.백제영역을 당나라에 양도하고 한반도이남에 만족한 신라만의 통일을 3국통일이라고 신라사관론자들에 의해 왜곡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 흉노.선비족의 후예들은 유전자적으로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북방유목민의 기질은 사라지고 한반도에 갇혀 외세와 짝해서라도 군대와 경찰을 수단으로 국민적 저항을 진압하고 권력과 기득권을 독점하려고 하니 이들 사라져야 할 유전자들이 한심하기 그지 않는 것이다.
흉노.선비족은 북방유목민들로 모두 단군조선시대부터 단군천제의 남동생들이 족장(대인.군장)으로 임명된 제후국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구려.백제는 단군조선의 황실의 피를 이어 받은 부여족인 것이다.그래서 백제황족들이 성씨를 부여씨라고 한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과 한반도지역에서 전쟁을 자주 벌인 것은 부여의 정통성을 두고 패권전쟁을 벌인 것이다. 즉, 백제는 한나라의 한무제의 위만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만조선유민들과 연합하여 물리치고 북부여를 접수한 동명성왕 고두막의 후예들인 구태세력인데,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해모수 직계손자 고추모가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의 뒤를 이어 북부여 단군에 임명되자, 이를 반대한 고무서 친척세력들이 바로 백제를 건설한 구태세력으로 본다. 중국문헌내용들은 구태백제에 대해 "동명(고두막)의 후예로 의롭고 용맹한 사람으로 동이강국을 건설했다. 백제는 구태를 시조로 제사지내고 웅진를 도읍지로 삼았다.백제영역은 바다건너 월주-양자강지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왜열도에 이르렀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구태세력 스스로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북부여를 접수한 고두막과 부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자신들이 바로 부여의 맥을 잇는 세력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고 보며, 역시 광개토태왕비문에도 고추모를 북부여천제(해모수)의 아들(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부여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고구려와 백제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전쟁은 국력손실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연개소문이 백제공격으로 인하여 신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상태가 되어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고구려로 달려 온 김춘추에게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에 3국 연합정권을 세우자고 2번이나 제안했으나 김씨로 성을 바꾼 선비족의 후손 김춘추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거국적인 발상은 당시 한민족이 통합적인 차원에서 나가야 할 진취적인 노선이였으며 오늘날 남북한 모두가 한반도통합을 넘어 조선족이 사는 만주를 통합하고 유라시아로 나가야 할 한민족통합의 노선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방해한 세력들이 바로 국민통합과 민족통합을 방해하려는 사대주의사관론자들인 반도사관론자들과 중국 동북공정론자들과 신라사관론자들이라 할 수 있다. 강대국과 손잡고 동족을 멸족시킬 생각은 동족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생각이다. 혈통적으로 이질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단군의 후예들이지만, 22대 고씨족 색불루가 21대 소태단군이 유목민들인 수유족 출신의 서우여에게 국가주요안건을 처리하는 5가 회의를 움직여서 일방적으로 단군즉위양도를 하려고 강행하려고 하니 취소하려고 요구했고 듣지 않자 한웅천황이 도읍한 신시지역인 백악산 아사달(장춘)에서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단군천황에 오르니 이에 반기를 든 수유족들이 단군조선의 직접통치를 벗어나 유라시아 초원지대로 이주하니 이들이 바로 서방에서 스키타이로 불리우는 흉노라 할 수 있다. 스키타이.흉노라고 할 때는 유목생활을 하던 고대 한국인들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신라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바로 흉노.선비의 후예들이였으니 색불루 후예들인 부여족(고구려.백제)과는 혈통적으로도 이질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선비족의 나라 당나라와 손을 잡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혈연적 결합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신라 본기 제 5 태종무열왕의 본문에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대의 백제정벌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월 唐高宗(당고종)은 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金仁問(김인문:김춘추 아들)을 副大摠管帥(부대총관수)에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등은 水陸軍(수육군) 13만명으로 백제를 토벌하는 勅書(칙서)를 내리시니 王(무열왕 김춘추)은 우夷道行軍摠管(우이도총관)이 되어 장병으로 하여금 聲援(성원)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은 金庾信(김유신), 眞珠(진주), 天存(천존)등을 서울에서 장병을 출동시켜 6월 18일 南川停(남천정: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萊州(래주:산동성 액현)에서 출발하여 船舶(선박:배)을 띄워 1000리의 물길을 따라 동쪽(한반도 서해)으로 내려왔다."
▲1층 몸돌 사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충남 부여정림사지1층 탑신부에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명으로 새긴 ‘대당평백제국 비명’은 이내 처연한 상념을 부른다. 부여의 중심 사찰이었던 정림사는 백제가 멸망하던 날 불에 타 없어지고 정림사의 석탑만 남아 있다. 석탑에 당시 백제의 인구가 적혀 있는데 그 숫자가 한반도로 백제를 국한해서는 나올 수 없는 인구 600만 명이다. 당시 인구는 백제의 부와 힘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었다. 한반도 서남해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동남아-인도까지 연결하는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의 역사적 실상을 증명하는고고학적 유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