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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다. 각 매체마다 특집 기사나 방송을 준비했다. 공통주제는 한글의 우수성 또는 한글사랑이다. 정부도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한다고 한다. 좋다. 1년에 한 번이라도 기억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를 보면 한글날을 1년에 한 번 상 차리고 은덕을 추억하는 한글 제삿날이라 해도 할 말 있는가.
한때, 우리의 어설픈 영어 발음을 두고 ‘영어가 객지에 나와 고생한다’는 우스갯말이 유행했다. 초보 영어시절의 이야기다. 요즘은 어떤가. ‘영어가 객지에 나와 호강한다’해도 전혀 틀리지 않다. 영어에 엄청난 돈을 갔다 바치고, 국가기관, 공기업, 민간기업, 상표도 모자라 지방자치단체까지 ‘하이 서울’이니 ‘컬러풀 대구’니 하며 언어 식민지를 자처하고, 뭐든지 영문 이름을 붙여야 고급스럽고, 일상 대화에도 영어 단어 몇 개 끼워 말해야 유식한 사람으로 통하니, 가히 이 나라는 영어 광신도 집단이라 해도 딱히 변명할 말이 없다.
우리 현대화 역사는 일제 지배시대를 빼면 60년 남짓이다. 민족문화가 말살되는 치욕을 겪고, 국토가 초토화되는 전쟁을 겪고도 짧은 시간동안 세계 10위권을 다투는 나라로 성장했다. 그 근본엔 우리문자인 한글이 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전기도 자동차도 아닌 문자다. 경험과 연구로 축적된 지식과 정보가 문자로 기록되어 전파되었기에 문명이 진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자인 한글이 있었기에 선진 문물이 국민들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진행의 예로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 중 한글이 중요한 하나라는 것은 상식 아닌가.
방향을 잠깐 돌려 중국을 보자. 한자가 하도 불편해 내부적으로 한때 한글을 도입하기 위한 연구와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실행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세계의 중심임을 자처하는 나라의 자존심, 즉 정치적 이유에서다. 만약 중국에 한글이 도입된다면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그만큼 문명의 진보에는 효용성이 뛰어난 언어가 큰 역할을 한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문자로 채택해 화재가 되었다. 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현 수단만 바꾼 것이다. 종족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물론 한글의 우수성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찌아찌아족’의 예에서 보듯 한 나라의 언어는 나라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곧 혼과 같다. 중국이 한글 도입을 포기한 것은 중화(中華)라는 나라의 혼이 퇴색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서 한글보다 영어가 더 고급 문자라 생각한다. 거의 숭상 차원이다. 서양 문물에 대한 동경의식이 아직도 남아있어서가 아닌가. 나라를 이만큼 만들었으면 낡은 천민의식을 버릴 때도 되었지 않은가. 더 한심한 것은 온 나라를 영어로 도배질하는 것이 세계화, 선진화라 생각하는 일부 미친(?) 또는 자주성 없는 세력이 권력 내부에도 있다는 것이다.
유행처럼 번지는 세계화는 영어만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글이 제 나라에서도 천대받아 고생하는 세상, 한글날이 한글 제삿날이 되지 않으려면 너나 할 것 없이 정말 지독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오늘 세종대왕 동상 제막한다는데 ... 부끄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