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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이윤율과 자본축적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역시 자본가들은 끊임없는 경쟁에 시달려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느 한 기업이 생산의 규모를 확장시켜 생산능력을 올렸다고 합시다. 경쟁기업들은 이 기업과 대적하기위해 규모를 확장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고용인력은 늘어나게 됩니다. 노동수요의 증가는 임금수준을 생계수준 이상으로 인상시킵니다. 기업주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될 수 있으면 인력을 기계로 대체하려 들 것입니다.계속 노동인력에 의존하다가는 높은 임금 때문에 잉여가치가 땅에 떨어져 이윤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기업 간의 경쟁은 노동인력과 기계의 대체를 낳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업주들은 스스로의 꾀에 넘어가 난관에 직면합니다. 앞에서 잉여가치란 궁극적으로 기계가 아닌 인간(노동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이제 생산기계를 만드는 기업주들은 그들 기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있습니다(만약 초고속 현상기가 사진 현상작업의 능률을 몇 배 증가시킬 수 있다면,현상기 제작회사는 그 현상기를 성능만큼이나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이윤율 공식인 잉여가치/(불변자본 가변자본)을 한 번 더 눈여겨보시죠.기업주들이 기계를 사들임에 따라 불변자본의 비용은 증가하여 이윤율이 떨어지게 됩니다.그렇다고 기계를 안사들이면 그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은 산업분야를 막론하고 투입자본량의 증가를 필수적으로 유발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법칙이다.경쟁은 개개인 자본가들로 하여금 이 내재적 법칙을 외부로부터의 강제적 법칙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자본가들은 이미 투자한 자본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본을 추가 투자하게 된다. 축적하라, 또 축적하라! 이것이야말로 모세를 비롯한 대 에언자들의 진리로 통한다.... 그러므로 저축하라, 또 저축하라! 잉여가치나 잉여상품의 최대량은 다시 자본의 형태로 재투자되어야만 기업은 생존할 수 있다!>
어느 자본가가 스스로 기계를 향상시켜도 마찬가지 결과가 일어납니다.그 자본가는 보다 좋은 물건을 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이제 다른 자본가들은 그와 경쟁하려면 노동에서 나온 잉여가치를 신 기계개발에 투자해야만 합니다.
자본가들의 `끝없는 욕심` 은 멸망을 자초합니다.어떤 기업주들은 이윤감소를 일시적으로나마 막아 보고자 노동력을 더욱 착취하려 할 것입니다. 작업시간은 더욱 연장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술수들은 노동자들의 인내심을 위험수위로 연장시켜 놓을 뿐입니다.
경제력 집중화의 가속
자본가들이 사업 확장과 신기술 개발로 치닫게 됨에 따라 전쟁은 발발합니다.이 전쟁의 승리자는 항상 대기업들입니다. 대기업은 사업 확장과 기술개발 측면에서 커다란 이점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소규모 자본가들은 언제나 참패하여 그들 자본의 일부는 정복자(대기업)의 수중에 넘어가고 일부는 사라지는" 양상이 벌어집니다.생존자는 낙오자를 집어삼킵니다. 몇몇 대기업은 경제력을 독식합니다.
경기침체와 위기의 고조
"어린애의 말장난... 허풍...잠꼬대 같은 소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안정성에 대한 세이(J.B.Say/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는 소위 <세이의 법칙>을 만든 학자입니다./김승웅 주)의 논리를 코웃음 치며 일축했습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기계로 대체하면 실직 율은 증가합니다.노동자들은 굶주리며 집안에서 어슬렁거립니다. 그렇다면 자본가들이 대량 생산해 낸 상품들을 사 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무도 없습니다.
버는 돈이 있어야 사든지 하지요. 상품들은 진열대에 넘쳐나게 쌓이지만 상인들은 파리만 날릴 뿐입니다. 기업들은 곳곳에서 도산합니다. 공포가 밀어 닥칩니다. 금융업자들은 주식을 휴지 다루듯 하고 투자는 땅에 떨어집니다. 투자가들은 자기집 발코니에서 떨어집니다.
물론 상품가격이 일단 폭락하고 나면 상황은 좀 개선됩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업들은 피폐해진 사업을 재정비하고,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을 불러 모을 것입니다.잉여가치와 이윤은 회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 얼마 후 같은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경기는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집니다.
이 대목과 관련, 이 글의 역자인 이승환 씨(68년 대구 産. 예일대 경제학과와 보스턴大 로스쿨 졸업)는 다음과 같은 역주(譯註)를 붙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불황의 위기가 곧 자본주의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오히려 그 반대로, 위기가 자본주의를 매번 구한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받아들이게 되고 생존 기업들은 부도기업들을 인수함에 따라 경제는 다시 돌아갈 것이고 잉여가치 또한 발생할 것이다.마르크스주의 최대 석학 슘페터는 대공황 당시 하버드에서 강의했었는데 학생들에게 강한 독일어 억양으로 다음처럼 말했다고 한다."신사 여러분, 불황에 대해 걱정되시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자본주의에 있어 불황이란 고맙고도 시원한 두쉬(Dusche)와도 같는 것입니다" 두쉬는 독일어로 소나기란 뜻인데,학생들은 대체 저 오스트리아 귀족 영감이 무슨 소릴 하나 하고 어리둥절했었다고 한다.자본주의의 비극은 위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위기에 의해 구제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한 차례의 위기가 끝나고 경제가 회생되면 더 큰 한 차례의 위기가 닥친다. 이는 마치 자신의 피를 팔아서 빵을 사먹을 돈을 마련해야 하는 이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산업예비군
계속되는 노동→기계의 대체와 경기침체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린 실업자들의 숫자는 늘어만 갑니다. 이 거리의 산업 예비군들은 처음 얼마간은 구세군만큼이나 유순하고 비폭력적입니다. 처음 얼마간은, (다시 말해서) 이들이 평화롭고 유순한 동안 자본가들은 저렴한 노동력의 혜택을 한껏 누릴 수 있습니다. 풍족한 노동력은 자본가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돕습니다.처음 얼마간은...
비참해지는 프로레타리아
"모든 이익을 독점하고 수탈해 가는 몇몇 대자본가들만이 생존함에 따라 ... 대중이 겪어야 할 곤궁, 핍박, 타락, 착취는 가중된다"
노동시간의 연장과 휴가의 박탈은 이미 유린될 대로 유린된 노동자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마르크스는 초창기 저서에서 노동자들의 절대적 생활수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저하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무렵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오히려 향상되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절대적 생활수준이 아니라 상대적 생활수준이 저하된다고 <자본론>에 적음으로서 일보 후퇴합니다)
실직, 이윤의 폭락, 감내하기 힘든 절망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마침내 프로레타리아는 그들의 처지를 깨닫습니다. 상부구조의 가면은 벗겨졌습니다.자본주의라는 흉측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압박받던 자들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자본주의적 사유에 종언을 고하는 조종(弔鐘)이 울린다.수탈했던 자들이 수탈 당한다!"
프로레타리아들은 공장만을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격을 되찾습니다.자본가들은 그들의 주머니만 강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인간의 삶에 있어 노동이란 대단히 중요한 역할 담담한다고 마르크스는 믿었습니다.인간은 누구나 창조(creation)에의 열망을 지녔으며 자연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싶어 합니다. 인격은 창조적 노동 없인 발전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이란 그저 상품의 하나일 따름입니다.사람들은 틀에 박힌 지겨운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기계도구에 불과합니다.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동료들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alienation)를 느낍니다.이 인간소외라는 주제는 마르크스 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의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