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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먹거나 내다팔 소,돼지 한마리 없는 시골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식생활 문화도 전통적 채식위주에서 서구형 육식위주로 바뀌어 가고있다. 이처럼 식생활 문화가 바뀌면서 육류소비가 엄청나게 늘었다. 이로인해 국내산만으로는 부족한 육류를 감당할 수 없어 미국,호주,뉴질랜드,중국,칠레,유럽 각국으로 부터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대량 수입하고 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면서 고깃값이 오르자 소,돼지,닭,오리등 가축을 사육하는 기업형 축산농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소,돼지의 경우 적게는 수십마리,보통 수백마리,대형 농장은 수천마리를 키운다. 이들 농장들은 짧은 기간동안 사료를 대거 투입하여 기계로 붕어빵 찍어내듯 속성 사육해서 시장에 공급한다. 이렇게 해야 수지가 맞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가마다 소 또는 돼지를 한마리씩 자녀들 시집 장가 밑천,등록금용으로 기르던 전통적인 사육형태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욱이 논농사는 물론이고 밭농사까지 땅을 갈고 고르고 씨앗파종,모심기,농약및 비료살포,수확,운반 모든것을 첨단 영농기계가 전담하면서 소나 말등 가축과 사람의 손이 거의 필요없게 되고 산업화에 따른 이농으로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어 소꼴을 베고 여물을 끓이는데 힘이 부치다 보니 소,돼지를 키우는 농가가 한집도 없는 시골마을이 수두룩하다. 노인들 보양식으로 더없이 좋은데다 집 근처 풀밭에 고삐만 매어 놓아도 풀뜯어 먹고 저절로 크는 염소도 고삐잡을 힘이 없다며 키우지 않는다.
보릿고개 시절 재산목록 1호 소, 살림밑천 돼지
그러나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농사 이외에 돈벌이가 없던 산업화 이전 19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소는 자식들의 교육,혼사 밑천으로 집안의 재산목록 1호인데다 농사짓는데 없어서는 안될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다 보니 소 한마리를 키우는게 농부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돼지 또한 보통 200근씩 자라는 바아크셔,요크셔,두룩저어지등 외래종과 달리 품종 자체가 왜소한데다 구정물과 사람똥만 먹고 자라 잘 키워야 백근(60킬로그램)에 불과한 재래종 흑돼지이지만 새끼를 놓이거나 키워 팔면 가계에 도움이 되다보니 한두 마리 키우는건 기본이었다.
이처럼 시골 농가치고 소나 돼지는 물론 염소,닭,토끼,복날 잡아먹는 복다름용 개까지 짐승을 키우지 않는 집이 없었다. 다 자란 소는 암소의 경우 농사용으로 계속 부리면서 송아지를 낳으면 팔아 소득을 올리고 황소는 농사용으로 계속 사육하면서 남의 논밭을 갈아 주는것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러나 목돈이 필요할 경우 장날 우시장에 내다팔고 판돈중 일부로 송아지를 사다 기른다.
돼지는 사나흘 간격으로 돼지장수가 짐빠리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순회할때 돼지금을 봐가며 돼지금이 좋거나 급전이 필요하면 넘긴다. 돼지를 팔기로 결정하면 돼지 장수가 돼지우리로 들어가 돼지 꼬리를 단단히 잡고 끌고나와 주인과 합세하여 옆으로 넘어 뜨려 놓고 무릎으로 배를 눌러 제압한 상태에서 새끼로 앞뒷다리를 엑스자로 교차시켜 꽁꽁 묶는다. 두발을 묶는 동안 돼지는 자신이 저승길을 간다는 사실을 아는지 동네가 떠나가도록 꽥꽥거리면 새끼줄을 풀려고 발버둥 친다.
돼지를 묶는 동안 주인집 식구들이 마을에 하나뿐인 큰 몽둥이 저울을 가져오면 돼지다리 사이에 나무 작대기를 끼워 주인과 구경나온 동네 사람이 거꾸로 매달아 어깨에 메어 저울로 달아 돼지값을 계산한다. 계산이 끝나면 돼지장수는 타고온 짐빠리 자전거에 돼지를 들어올려 요동쳐도 떨어지지 않게 밧줄로 묶은후 읍내 도살장으로 신나게 페달을 밟는다.
맛볼 고기맛을 생각하면 정겹게 들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
키운돼지를 이와같이 돼지 장수에게 산채로 넘기는게 대부분 이었지만 마을에서 직접 잡아 한두근씩 나누어 파는일도 흔하였다. 요즈음은 자동화,위생시설을 갖춘 허가받은 전문 도축장에서 도살하지 않고 몰래 마을이나 개인집에서 소,돼지를 잡으면 처벌 받지만 19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에는 불법 도축에 관한 법적 개념이 없다시피 하였다. 당시에도 값비싼 소를 마을에서 함부로 잡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돼지는 요즘같은 추석,설날대목이나 필요할때 도살하는게 당연시 되었다.
당시에는 읍내 정육점에서 직접 사다 먹기 보다는 마을에서 직접 돼지를 잡아 먹었다. 마을 부잣집 혼례나 장례,환갑등 애경사가 있을때 잡는 돼지는 잔치 행사용으로 사용하였지만 명절과 동네여론이 고기맛을 볼때가 됐다는 쪽으로 모아질 경우 돼지를 내놓겠다는 집들 돼지들 가운데 적당한 놈을 골라 잡았다. 돼지를 잡기로 결정되면 돼지 잡이용 부엌칼 두어자루를 숫돌에 날이 퍼렇게 서게 갈고 쇠죽을 끓이는 가마솥에 물을 데운다.
돼지를 잡게되면 창자를 순대로 만들어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기 때문에 공짜 고기맛을 보기위해 마을 남정네는 거의 빠짐없이 모여든다. 물이 끓을때쯤 다리를 묶인 돼지를 옆으로 눕혀 요동치지 못하도록 장정 2~3명이 돼지를 누르고 칼을 든 멱따기 전문 사내가 꽥꽥대는 돼지 목부분을 우측 무릎으로 누르고 왼손으로 돼지턱을 잡은 상태에서 오른손에 든 칼로 목 동맥 부분을 찔러 후빈다.
이때 한사람은 냉큼 세숫대야나 함지박,간장독 뚜껑을 칼지른 목밑에 바짝 갖다댄다. 칼을빼면 싯뻘건 피가 콸콸 쏟아진다. 돼지가 숨을 몰아 쉴때마다 쿨럭대며 피가 튀기 때문에 피를 받는 사람은 옷을 버리기도 한다. 피가 거의 다나오고 거품이 나올때쯤 돼지도 숨을 거둔다. 돼지가 피를 쏟을 무렵 집주인은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구정물 통에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을 바케츠로 퍼담는다.
물이 채워지면 돼지를 물통에 담궈 뜨거운물에 두세번 뒤집어 충분히 적셔지도록 한다. 어느정도 지나 털이 잘 뽑히면 돼지를 끌어내 놓고 털을 뽑고 때가 벗겨지도록 짚뭉치로 문지른다. 털이 모두 벗겨지면 장정 네명이 각자 다리를 하나씩 붙잡아 들고 도랑 빨랫터로 옮긴다. 빨랫터에서 돼지를 잡는것은 넓은 빨래판돌들이 여러개 있어 돼지를 올려놓기 좋고 창자를 뒤집어 문질러 똥물을 빼기가 쉽기 때문이다.
빨랫터 옆에는 넓직하게 짚을 깔아 둔다. 빨랫판에 올려진 돼지는 바가지로 물을 퍼 몸뚱이를 깨끗이 씻은후 먼저 칼로 목을 잘라 머리를 분리한후 배를 가른다. 배를 가른후 간, 위장,창자등을 끌어낸다. 칼잡이는 이때 끌어낸 간에서 쓸개를 떼내고 먼저 간 한점을 썰어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데 둘러서 있는 남정네들이 이때 간한점 맛을 보기 위해 침을 꼴깍 삼킨다.
이걸 모르지 않는 칼잡이는 "맛좋다" 한마디 하면서 간을 한점씩 떼내 나이든 어른 순으로 "함양대부,한점 맛이나 보시시요" 하면서 건넨다. 모두들 간조각을 입에 넣고 "싸그락 싸그락" 소리를 내며 씹으면서" 참 고놈 맛이 고소허네" 한마디씩 하는가 하면 한점만 더 달라고 보채기도 한다. 바가지로 물을 퍼 다시 뱃속과 피묻은 몸뚱이를 씻어 깔아놓은 짚위에 옮겨놓고 사고 싶다는 양만큼 한두근씩 떼내 눈금 저울로 무게를 단후 칼로 고기에 구멍을 내 들고 갈 수 있도록 짚서너개를 꿰어 끈을 만들어 건네준다.
이때 한사람은 치부책에다 고기를 사가는 집 택호와 고기근수를 적는다. 돼지다리는 부인들 산후조리나 노인들에게 고아 먹이면 좋다하여 서로 가져가려고 경쟁이 심한데 뜻을 모아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건넨다. 몸통을 분리하여 고기를 나누는 동안 서너명은 창자를 팔벌린 길이 만큼씩 잘라 속을 뒤집어 흐르는 도랑물에 휑구어 똥을 제거한뒤 최대한 똥냄새가 적게 나도록 빨랫돌에 올려놓고 두손으로 득득 문지른다.
너댓번 문지르고 물에 씻어 냄새가 어느정도 빠지면 한쪽끝을 묶고 한쪽 주둥이를 벌려 들고 있으면 한사람이 피를 담은 주전자를 들고 피를 넣는다. 피를 넣은후 나머지 한쪽을 묶으면 순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든 순대와, 위,간을 주인집으로 가져가 삶아 고기를 다 나누고 난후 마을 남정네들 위주로 사랑방에 모여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왁자지껄 하게 떠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