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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무정이 실감나는 현대판 시골농촌
오늘날 농촌 시골마을의 특징은 초고령화 사회라는 점이다. 사오십대 젊은 농부가 한집도 없는 마을이 적지않다. 마을 인구의 대부분이 칠팔십대 노인들이고 60대 정도 나이면 젊은이 취급을 받는다. 따라서 마을이장도 노인들이 맡고있는 마을이 많다. 노인들만 남아 있다보니 십년이상 갓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마을이 수두룩하여 아이 울음소리를 잊어버린 노인들까지 생겨 날정도다.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아기를 낳아야할 젊은이들이 거의 대부분 도시로 빠져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날 같으면 농삿일에서 손을 떼고 어른 대우를 받으며 손주의 재롱을 보거나 사랑채에 모여 곰방대 빠끔거리며 한담을 나누며 몸이 가려우면 골마리 까뒤집어서 서캐나 깔강니를 잡던 칠팝십대 노인들이 지게를 지고 뒷동산 고추밭,채소밭에 거름을 내거나 구부정한 허리에 삽이나 괭이를 든 뒷짐진 모습으로 새벽 논물꼬를 보러 다니는 모습이 흔하다.
소도 기르지 않고 힘이 없다보니 노인들이 짓는 농사라야 먹을 양식과 객지에 나가 살고있는 자식들에게 가을 추수후 쌀한자루씩 보내주기 위해 열마지기 내외의 벼농사를 마지기로 계산하여 품삯을 주고 트랙터,이앙기,콤바인을 불러 짓거나 추석,설날 명절에 찾아와 용돈을 쥐어주는 자식들을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싸줄 요량으로 밭뙈기에 고추,콩,깨,감자,고구마를 심는 정도다.이처럼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사람이 없어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산골짝에 있는 논밭은 묵힐 수 밖에 없어 그곳이 농사를 짓던 땅이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쑥대밭이 된곳이 허다하다.
전업농,기업형 축산,원예농가 차지한 시골마을
그나마 지게가 아니면 농사를 짓기 어려운 산속 논배미를 빼고 대부분의 문전옥답이 놀지 않는것은 관정 설치등 관개시설 개선으로 물부족을 해소하는 한편 농사짓기 편리하도록 정부가 지속적으로 경지정리 사업을 추진하고 농로를 넓혀 콘크리트 포장으로 말끔하게 닦아준데다 기계화,과학화 영농으로 대규모 농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개시설 개선,농지정리,과학화,기계화에 힘입어 마을마다 최소한 한가구 이상씩 농사를 천직으로 삼는 사오십대의 전업 농부가 들어서고 있다.
이들 전업농들은 트랙터로 땅을 갈고 로타리를 쳐 이앙기로 모를 심고 제초제로 잡초를 제거하면서 자동화된 분무기로 병해충을 잡을뿐 아니라 비료까지도 살포기로 논에 들어가지 않고 논두렁을 오가며 뿌린다. 벼가 익으면 콤바인으로 자동 탈곡하여 멍석에 널어 말리는 수고로움 없이 건조기로 말려 자동차에 실어 공판에 내거나 미곡 생산 전문 정미소에 넘기면 일년 농사 끝이다.
모판을 만들고 모내기후 잘 안심어 졌거나 구석진곳을 대상으로 모때워 심는일만 손으로 할뿐 모든걸 기계로 하기 때문에 농부 한사람이 자기논은 물론 힘이 부쳐 농사를 내놓은 마을노인들이 짓던 논배미와 객지로 나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는 부재지주 논,그리고 종중 소유 종중답들을 통째로 맡아 짓다보니 평균 100~150 마지기를 짓고 있으며 호남평야등 들이 넓은 지역에서는 1000마지기를 넘게 벼농사를 짓는 농부도 많다.
쌀 전업농외에도 현대식 우사와 양돈장,양계장등을 지어 수십,수백마리의 한우와 돼지, 수만마리의 닭을 기르는 기업형 축산농과 딸기,고추,오이,가지,참외,수박,파프리카,꽃,약초와포도,배,사과,복숭아,자두를 비롯 각종과일등 고소득 특용원예 과수재배 농가가 즐비하며 이러한 작물을 연중 전천후로 지을수 있는 대형 비닐용 하우스가 마을마다 없는곳이 없을 정도다.
정겹고 순박하던 옛시골 풍경은 이제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이야기이처럼 산업화에 따른 탈농현상으로 인한 농촌인구 감소와 노령화,과학화에 따른 기계화 영농,기업적 축산농과 원예농가의 증가에 따라 전통적 재래 농삿법에 의해 농사짓던 1960~70년대 시골풍경은 찾아볼수가 없다. 개천가에 풀을 뜯던 소,염소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봄이면 쟁기질하던 소의 울음소리,"이랴"하던 농부의 다그침 소리도 들어볼 수 없다.
소쿠리 끼고 동산 밭뙈기에 쭈그려 앉아 달래와 깜밥나물을 뜯던 댕기머리 봄처녀들도 없다. 똥장군과 오줌장군,거름지게를 지고 뒷동산 밭뙈기를 오르내리던 농부,풀지게를 지고 콧노래 흥얼대며 풀베던 머슴,꼴망태 메고 소뜯기며 잠뱅이 차림으로 미꾸라지 잡던 아이들의 모습도 동화속의 이야기 일뿐이다. 보리타작하던 발동기 소리,못줄 놓아 모심으며 허리 회복제 삼아 불러대던 풍년가도 들을수 없다.
뙤약볕에 호미로 김을 매고 벼가 익어가면 참새쫒는 보초역할 하던 허수아비도 없고 손사래 휘저으며 "후여~후여~"하여 논두렁을 달음박질 치던 늙은 농부,그옆에서 손으로 덮쳐 잡은 메뚜기를 꿰임지에 꿰어 들고 깔깔대던 아이들의 모습도 아련하다. 찰랑 거리는 벼를 능숙한 낫질로 베어 논에 깔아 말렸다가 지게로 져 날라 낟가리를 만들고 날잡아 허물어 마을 아낙네 10여명이 마당에 둥그렇게 홀태를 놓고 벼를 훑던 모습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벼훑던 아낙들은 따라온 아이들과 주인집이 무우넣어 조려 만들어 내놓은 갈치조림 반찬에 점심과 저녁을 때우고 품삮으로 받은 쌀 한됫박을 아이손에 들려 앞세우고 홀태를 머리에 인 모습으로 싸립문을 들어서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이었다.하루내내 홀태질에 힘에 겨워하던 어머니들의 얼굴도 함께 사라져버렸다.그처럼 힘들고 늘 배고픔이 따라 다녔던 가난한 삶이었지만 파괴되거나 오염되지 않았던 시골풍경이 자랑이었던 그시절은 이제 호랑이 담배 먹던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