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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보다 한수위 달구지,리어카,자전거
자동차라는 현대화된 운반수단이 일반화된 오늘날과 달리 농촌지역에 자동차가 보급되지 않았던 7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짐을 운반하던 도구는 사람의 힘을 이용하는 지게였다. 지게는 논밭에 거름을 내고 수확한 보리,벼,고구마,감자,무,배추등 농산물을 거두어 들이거나 땔나무,퇴비용 풀짐을 나르는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지게는 전적으로 사람의 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나를수 있는 양, 운반할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지겟꾼이 병들거나 사망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었다.
더구나 사람의 힘을 초과하는 무거운 짐이나 많은 양을 운반할 경우,또는 먼거리를 짐을 가져가야 할때는 지게로는 감당할수가 없었다. 물론 6.25전쟁전까지 하인이나 노비를 부리던 부잣집이나 문중의 짐만 전문으로 져나르는 '짐동이'이라고 부르던 하인을 두었던 문중은 이들을 지겟꾼 삼아 수십리 읍내 장보기를 하였고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도 나뭇짐을 지고 읍냇길을 오가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무거운 짐을 다량으로 먼길을 옮길수는 없었다.
자갈길 덜컹대던 소달구지,손수레 리어카
이러한 지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운송수단이 달구지였다. 달구지는 소,말,나귀,노새등이 끌었는데 주로 달구지를 끈것은 소와 말이었다. 그러나 소나 말도 역할이 구분되었다. 시골마을에서 농산물과 ,나무,풀짐을 실어 나르는건 거의 소달구지였고 조랑말이 끄는 달구지는 주로 읍내에서 달구지에 사각형 함을 얹어 건축용 모래나 자갈을 하천에서 실어 나르거나 시장에서 짐을 옮기는데 주로 사용하였다.
6.25전쟁 이후 미군이 많이 주둔하고 점차 자동차 보급이 늘어 나면서 생긴 폐 타이어를 달구지 바뀌로 이용하기 시작하던 1960년대 중반이전에는 달구지 바뀌는 전통적인 나무바뀌를 사용하였다. 달구지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달구지 제작 전문 목수가 만들었다.
달구지를 만드는 목재는 단단한 참나무가 사용되었다. 참나무를 널판지로 켜 대패질을 하여 틀을 짜고 약 3미터 내외의 견인대 2개를 앞쪽 양쪽으로 달아 낸다. 견인대 끝에는 소멍에에 걸 수 있도록 쇠고리를 부착하고 적재함 옆과 뒷면에는 밧줄을 걸 수 있는 ㄱ자형 꺾쇠를 여러개 단다. 바뀌는 바뀌 지주살을 박을 수 있는 둥그런 중심축,그리고 사각형으로 만든 14개의 나무 지주살,10센티 정도의 노면폭에 철판을 입힌 바뀌면을 짜맞추면 바뀌가 된다. 바뀌축 양끝에는 구멍을 내어 바뀌가 빠지지 않도록 바뀌를 부착한후 쇠로 만든 쇠꼬챙이를 끼운다.
소달구지는 쌀가마니 10개 가량을 실을 수 있고 볏단을 장정 10명이 지게로 짊어질 수 있는 양을 한번에 옮길 수 있다. 나무바뀌 달구지의 흠은 비포장 자갈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요란하게 덜컹거리고 사람이 탈경우 심하게 흔들릴만큼 덜컹거려 창자가 끊어질것처럼 속이 뒤집어 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소달구에 이어 들어온 리어카도 매우 유용한 운반수단이었다. 사람이 끌어야 하고 다닐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리어카도 한계가 있었지만 오르막길만 아니라면 쌀 대여섯 가마니는 한꺼번에 쉽게 옮길수가 있었다. 마을에 한대정도 밖에 없었던 리어카는 장날 마을에서 내다팔 쌀,콩등 곡식을 모아 실어가고 동네짐을 실어 오거나 보리,나락 공판때 공판장에 마을 공판물량을 하루내 실어 나르기도 하였다. 장날이나 공판날이면 리어카 주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밀고 다녔다. 쏠쏠한 돈벌이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승길 돼지 자가용이자 막걸리 배달 전용 짐바리 자전거
속도감이 뒤떨어지는 달구지와 리어카에 비해 신속성이 뛰어난것이 자전거다.당시 자전거는 이동수단인 신사용 자전거와 짐을 실어 나르는 짐바리용 두가지 형태가 주류였다. 요즈음에는 경기용,스포츠용,어린이용등 다양한 용도의 자전거가 많이 나왔지만 보릿고개 시절 시골에는 앞서 말한 이동용과 화물용 2가지 자전거 밖에 없었다.
신사용 자전거도 뒤에 사람을 한명 더 태울수는 있었지만 무거운 짐을 운반할수는 없었다. 이와달리 짐바리라고 부르는 짐운반용 화물자전거는 체대가 굵고 특히 뒷바뀌는 신사용보다 굵었다. 짐을 싣는 받침대도 크고 튼튼한 쇠로 만들어 졌으며 앞쪽은 굵은 철근을 ㄷ자형으로 만들어 거꾸로 세워 부착하여 짐을 많이 싣도록 보강하기도 하였다. 도시 광역화에 신속성이 요구되는 오늘날에는 오토바이가 짐바리 자전거를 대체하여 짐바리 자전거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짐바리 자전거는 도시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다.
그시절 시골 농촌에서의 짐바리 자전거의 용도는 두가지였다. 동네를 돌아 다니며 재래종 똥돼지를 사서 도살장에 내다파는 돼지 장수들이 100근 내외의 돼지를 묶어 실어 나르는 돼지운반용과 막걸리 배달용이었다. 주로 짐바리 자전거가 사용된건 막걸리 배달이었다. 농삿일 반주,새참,제사,마을잔치,초상 또는 결혼등 애경사에 주로 막걸리를 사용하던 때라 면단위로 막걸리 도가가 한집씩 있었다.
막걸리 도가는 면내 구역을 나누어 막걸리 배달부를 3~4명씩 두고 있었는데 이들은 짐바리 자전거로 막걸리를 배달하였다. 플라스틱 막걸리통이 보급되기전인 1970년대 초반 이전 막걸리 통은 모두 나무통이었다. 나무 막걸리통은 다섯되 짜리와 열되가 들어가는 한말짜리등 2가지가 있었는데 밑바닥쪽이 좁고 윗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깔때기형 원통으로 얇은 철판으로 위,아래,중간에 테를 두른 형태였고 윗면은 한쪽에 직경 7~8센티 크기의 구멍이 뚫려있고 나무로 된 마개를 사용하였다.
막걸리 배달부들은 '통개'라고 부르던 한말짜리 막걸리 통개를 양옆에 2개씩 네개를 매달고 위에 닷되짜리 서너개를 이중으로 쌓아 폐타이어로 만든 밧줄로 묶어 싣고 비포장 자갈길을 잘도 달렸다. 각마을에 도착하면 막걸리를 받아 파는 점빵이나 구판장 주인의 주문을 받은후 나무 마개를 빼내고 통개를 술독위에 거꾸로 얹어 놓으면 막걸리가 콸콸 소리를 내며 술독속을 채운다.
막걸리 통개 마개를 뽑을 때도 기술이 필요하다. 비포장 도로를 쿨렁거리며 달려와 통개안에 가스가 차있어 마개를 무조건 뽑을 경우 술이 튀어올라 쏟아질 수 있기 때문에 한손으로 마개를 누르고 다른손으로 돌멩이나 망치를 들고 마개 한쪽을 살살 두드려 벌어지는 가는 틈속으로 가스가 빠져 나오도록 한후 마개를 열어야 막걸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멸종되어 버린 달구지,짐빠리 자전거
플라스틱 통이 생기면서 막걸리 짐빠리 자전거 배달꾼들도 힘이 덜들게 되었지만 급격한 이농현상에다 생활수준 향상으로 소주,맥주를 선호하고 조상님들도 청주,백세주를 제삿상에 놓기를 바라면서 막걸리 수요가 줄어든데다 소형 화물차 한대면 배달에 문제가 없다보니 막걸리 배달 자전거는 이제 찾아볼수가 없다.
리어카나 소달구지도 경운기가 대량 보급된 이후 처마밑에 바뀌는 바뀌대로 달구지틀은 달구지틀대로 옆으로 세워져 방치되는 신세가 되더니 이제는 서울 인사동이나 전통 술집 꾸밈용으로 팔려 영원히 출장을 떠났거나 아궁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는지 행방을 알길이 없다. 아예 멸종되어 버렸다.책보를 등에 대각선으로 둘러메고 소달구지뒤에 올라타 집에 돌아오며 지나가는 짐바리 자전거에 술통개 매달고 지나가던 막걸리 배달부 아저씨에게"재건합시다"며 소리쳐 인사하던 그시절 시골, 이제 추억으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