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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대군이 밝힌 뼛속까지 친미친일 대통령 이명박요즈음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영일대군 이상득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의 사상적 정체성에 대해 고백한 내용이 최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외교 전문을 통해 밝혀지면서 국민일반의 분기탱천이 가히 하늘을 찌른다.
문제의 전문에 따르면 2008년 쇠고기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당시 동생 이명박 대통령을 수렴청정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정권 최고 실세 영일대군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 대사를 만나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2008년 5월29일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에 따르면 당시 이상득 부의장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미 대사를 만나 “궁극적으로 이 대통령은 미·일 양국과 잘 합력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 부의장은 또 “이 대통령은 친중국 성향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그때 이상득 부의장을 수행한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도 “최근의 역사 때문에 한국은 중국보다는 미국에 가깝다”고 거든 것으로 나타났다.또다른 전문에에서도 이상득 영일대군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대해 “이른바 ‘386 세대’가 중심이 된 반미·친북·통일 지향 집단이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반미·친북 시대(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잔재가 결국 힘과 영향력을 잃게 되면 이런 큰 문제들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영일대군의 이명박 친미친일 굴종주의자 만들기가 효력을 발휘한 대문인지 미국 외교 관계자들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리(미국)와 함께 헌신적으로 일하는 강한 친미주의자’ ‘사실상 모든 주요 문제에 미국을 지원하는 성향’ 등으로 평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득의원 말이 맞다면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숨진 이등박문 환생한 건가.
한핏줄인 친형 이상득의원이 동생 이명박 대통령을 뼛속까지 친일친미주의자라고 말했다면 그말이 맞을 것이다.대통령 취임이후 지금까지 철저한 사대굴종적 친일친미 외교 노선에 정권 운명을 걸다시피 하고 있는데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통령 이명박의 친일친미적 성향은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 대한 아전인수적 판단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태생적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이런 점에서 필자가 지난날 이명박 대통령의 굴종적 친일외교와 관련하여 이 대통령의 전생이 민족적 원흉인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이 아닐까 하고 분석한 글이 떠 올라 다시금 되새겨 본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 천왕시기 네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메이지 헌법 제정과 양원제 의회수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하면 통감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일병탄의 기틀을 마련하는등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정계거물로 1909년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을 맞고 숨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병탄과 관련하여 조화로운 해결을 추구하는 온건파로 알려져 있지만 총리재임시절 일어난 동학혁명군의 대일항쟁에 일본군을 투입하였으며 조선강점의 계기로 이어졌던 청일전쟁을 주도하는등 사실상 한민족을 일제 식민지배 노예로 만들었던 원흉중의 원흉이다.
이러한 이등박문이 일년후 우리민족의 국권을 강탈했던 한일병탄을 보지 못하고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고 죽었으니 아쉬움이 얼마나 컷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구천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는 반드시 환생하여 조선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어 후생에서라도 꿈을 실현해야 겠다며 절치부심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환생에 대한 염원이 이명박 대통령으로 나타난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과 윤회설이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증명된건 없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인다면 그럴 가능성을 무조건 배제할수도 없다.
그러고 보니 이등박문 닮은꼴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을 이등박문의 환생으로 보는데는 이명박 대통령이 이등박문과 유사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첫째,이명박 대통령은 이등박문이 죽은지 31년후인 일본에서 태어 났다는점이다.
둘째,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형제들과 달리 항렬자를 따르지 않았다. 형인 이상득 의원과 같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면 예를 들어 '상'자 돌림이면'상호'또는'상달'이로 '득'자 돌림이면 '천득'이나 '만득'이로 지었을법도 한데 그러지 아니하고 일본식 이름인'명박'으로 지었다. 이명박하면 이등박문의 성과 이름의 앞자를 따서 이명박으로 지은것처럼 우연의 일치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세째,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으로 건너와 통감을 지낸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에 잔류한 많은 재일교포와 달리 해방후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것도 그렇다.
네째,이토 히로부미가 정치권에 진출했던 젊은시절 유력 정치계파와 연줄이 없어 해외 사절단으로 영국과 미국등 해외를 전전하며 해군학,과세,조약개정,예산제도 연구등 실력을 쌓은게 인정받아 당시 정치권 강자였던 오쿠보가 암살되자 내무상에 발탁된후 수완을 발휘,총리에 오른것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임직원으로 해외를 나다니며 전문경영인으로 지명도를 쌓은게 바탕이 되어 국회의원,서울시장을 거쳐 당내기반이 막강했던 박근혜 전 대표를 물리치고 대권을 잡았다.
다섯째,집권후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을때 꼿꼿한 자세의 일본 천왕 부부에게 면종복배 하듯 깎듯이 인사한것이나 독도문제,과거사 문제에 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일본총리 대신처럼 보여졌다는 점이다.
여섯째,이토히로부미는 총리재임시절 일본군 1개 대대를 공주 우금치로 전격 투입하여 동학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야욕을 위해 주권을 지키려는 우리 백성의 목숨을 파리목숨이나 다름없게 여겼다. 그리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도 생존권을 지키려는 철거민들의 농성장에 경찰 특공대를 전격 투입하여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리고도 무려 일년만에 서울시가 유족들과 보상에 합의하여 장례를 치를때까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에게는 경찰에게 불리한 수사기록까지 공개를 거부하면서 무혐의 처리하면서 전봉준,김개남 장군등 동학군을 체포 처형한것처럼 철거민들에게 방화치사 사상죄를 적용하여 구속또는 불구속 기소하여 법적처벌을 받게 하였다.
일곱째,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헌법을 마련하는등 법 만들기를 좋아하고 양원제 도입등 의회를 좌지우지 하였듯이 이명박 대통령도 반민주 MB악법등 강행처리에 열을 올린 것이나 강기갑의원,전교조 시국선언,피디수첩사건 법원 무죄판결을 이념재판으로 몰아 사법부개혁 빙자 법원 시녀화 사법부 개혁입법을 추진하고 한나라당과 김형오의장의 엉덩이를 거더차며 국회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이토 히로부미와 짝퉁이다.
여덟째,허장성세에 관해서도 이토히로부미와 이명박 대통령은 같은 DNA를 가진 사람처럼 난형난제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소 "나는 술이 취하면 아름다운 여인의 무릎을 베고 잔다. 술이깨면 권력의 고삐를 힘차게 잡아쥔다"고 호언하였다. 이명박 대통령도 "보통 여자가 서비스가 좋다. 747공약으로 배부르고 등따습게 해주겠다"고 호언했지만 747공약 폐기,강부자위주 감세,부동산 정책과 복지예산 축소부른 4대강사업 강행등을 통해 알거지 신세가 된 국민들은 사기극이라며 분통을 터트린다.
아홉째,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호전광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대북 강경책으로 북측의 전면 대결태세 선언,미사일 발사등 역공을 부르는등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데 마치 전면전도 불사할것처럼 강경자세를 고수하고 있음을 볼때 이토 히로부미와 조금도 다를게 없다.
열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