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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한 권의 빛바랜 노트가 있다 1950년 겨울, 평북 초산 땅에서 스물다섯 나이에 전사한 나의 형님이 죽기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만든 노트인데, 내가 때대로 훑어보는 대목이 있다.그 무렵 건국을 선포한 공산 중국의 미래를 예측한 부분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형님은 돌아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황폐해진 마산 산호동 초가(草家)에서 나는 형님의 체취가 묻어있는 이 노트를 자주 꺼내 읽었다.
노트엔, 중공이 한 번은 중국 전역을 점령하겠지만 점령이 완료되는 그날이 중공이 파괴되는 날이라고 쓰여 있었다. ] 또 중국의 문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현실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도 쓰여 있었다.
역대 중국 혁명의 특성은 위대한 파괴주의자가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가면 그보다 덜 영웅적인, 그러나 건설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서 중국을 새롭게 평정한다는 것이었다.진시황과 한 고조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 노트는 나의 형님이 동양학과 국학의 대가이신 凡父 金鼎卨 선생의 강의를 듣고 정리한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붉은 밑줄이 그어진, 낡은 43쪽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해방공간의 고뇌를 몸으로 익히며 쓴 이 노트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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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주체'들이 나라를 계속 이끌어주기를 바랐던 모택동의 희망은 주은래,유소기, 등소평의 목숨을 건 저항 끝에 무산되고,오늘의 중국은 '발전의 주체'들이 이끄는 나라로 변했다.'파괴의 주체'들이 중심이 되었던 시대에서 '건설의 주역'들이 새롭게 중국을 평정하는 시대로 이행된 것이다.
오늘의 중국의 명제는 '대파(大破)'가 아닌 '대립(大立)'이다.건국에서 개혁개방까지 30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한국전쟁이라는 예기치 않은 변수가 있었고,혁명 지향, 이념 지향의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모택동의 파괴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참담했던 파괴의 뒤안길에도 다음 시대를 예비하는 한 가닥의 불빛이 있었다.모택동, 주은래 합작의 미국과의 화해가 그것이다. ..............................
범부 선생은 이 강의에서, 진시황과 한 고조의 예를 들면서 현대 중국의 파괴와 건설의 이행을 예견했다.
그런데 오늘의 중국에서는 파괴와 건설의 주역이 다같이 중국공산당이란 점이 특이하다.파괴와 건설이라는 이질적인 두 가치를 동질의 공산당이 아무런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현대 중국의 묘미라면 묘미이고 오늘의 중국을 풀어가는 열쇠라면 열쇠라 할 수 있다.
1998년 7월에 나는 중경과 사천성의 성도로 갔다. 등소평의 고향인 광안을 찾아서 그의 생가와 어릴 적 다녔던 학교와 양친의 묘소 등을 돌아보았다.그의 부친 등소창의 묘는 논두렁길에 소박한 모습으로 있었다.
진한 감동이었다.
1999년 1월엔 철도로만 1만 1,820 킬로미터를, 자동차 등으로 1천 여 킬로미터를 달렸다.답사를 하면서, 또 글을 쓰면서 나는 내 마음 속에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중국의 혁명 유적지와 지도자들의 연고지를 찾고 방대한 관련자료들을 뒤적이면서 탐방의 대상이나 인물 자체에 몰입하는 동시에 내가 살아온 나라의 운명과 현실 쪽으로도 마음이 쏠렸다.
어제는 항상 부당했고, 오늘은 언제나 정당하고, 내일엔 다시 오늘이 부정되는 나라.이어지는 단절과 파괴 속에서 정체성마저 위기에 놓여있는 나라.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건국에 대한 부정의 논리가 공공연하게 펼쳐질 수 있는 나라.위인의 이름을 딴 어떤 기념관이나 공원, 비행장도 하나 없는 나라.있는 것은 계속 무너지고, 계속 허물어버리는 나라.
중국은 지난날의 모택동과 중공당의 과오를 호되게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당성만은 철저하게 옹호한다. 파괴와 건설, 혁명과 발전,이념과 개혁개방이라는 상반되는 가치를 함께 수용하고 개발시켜 나가는 주체가 바로 중공당이다.모택동과 등소평 시대를 역사적 단절로 보지 않고 중공당의 정통성과 맥을 잇는 것으로 그들은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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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흥분되고 절제되지 못한 표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그러나 저의 '속마음'만은 어지간히 전달되리라 생각합니다.
모택동 이론 가운데, <지구전론(持久戰論)>이란 것이 있습니다.항일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다짐하며 펼쳤던 이론입니다. 저는 <모택동과.....>의 마지막 맺음말 같은 것을 지구전과 결부시켜 썼습니다.책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중국공산당 자체가 지구전으로 출발하여 지구전으로 오늘의 중국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모택동의 '강한 나라'에서 등소평의 '잘 사는 나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10억이 넘는 중국 인민들은 오로지 지구전으로 버텨온 것이다.
중국인민과 중국공산당의 지구전은 계속될 것이다. 모택동의 제1장정보다 더 험하고 긴 등소평의 제2장정도 지구전에 근거하고 있다.지구전의 끝은 어디쯤일까?
모택동은 지구전을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중일전쟁이 지구전이고 또 종국적 승리가 중국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지구전이 세 단게에 걸쳐 구체적으로 표현되리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단계는 적의 전략적 공격, 우리의 전략적 방어의 시기이며,제2단계는 적의 전략적 수비, 우리의 반 공격적 시기이며,제3단계는 우리의 전략적 반공격, 적의 전략적 퇴각의 시기이다." 중국의 전략적 반공격과 적들의 전략적 퇴각이 시작될 시기는 과연 언제쯤이 될까?.........................
모택동 지구전의 주적은 일본이었습니다.그렇다면 오늘의 중국의 주적은......?
적이 퇴각하고 중국이 공격하는 제3단계, 그 시기는....?
불과 10년 사이에 중국은 엄청 변했고, 지구의는 쉼 없이 돌고 돕니다.
"아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외치고 싶습니다.
<이중/연변과기대 부총장/전 숭실대 총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