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민족사에서 KOREA족이 낳은 위대한 군주로는 광개토태왕과 징기즈칸을 들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사에서 최고의 비극적인 왕으로 기록된 할아버지 고국원태왕이 백제의 공격으로 남평양성에서 전사한 후 큰 아버지 소수림태왕의 법령공포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기반으로 무기력하고 궁핍한 고구려를 찰갑으로 무장한 정예기마부대와 개마무사를 기반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통을 가한 주변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물적토대를 고구려화하여 강력한 정치.경제.군사강국으로 건설하였다.
광개토태왕은 12세에 태자에 책봉되어 18세에 태왕에 즉위하여 고구려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가 되었는데, 이는 [환단고기]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일찌기 마니산에 올라 제사를 드릴 정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민족신앙을 가지고 단군조선의 옛영토와 홍익정신을 모두 회복하겠다는 개국성조 고추모의 다물정신에 충실한 왕이였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과 마찬가지로 징기즈칸도 하늘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신성한 사명을 늘 의식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몽골족의 최고신에게 깊은 경배를 올렸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유년시절에 특히 강했다.
광개토태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여 거란족에게 끌여 간 고구려 유민1만여명을 구해 왔으며, 할아버지 고국원태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정벌하여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냈으며,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국원태왕의 아버지 미천태왕의 시신을 도굴하고 고국원태왕의 어머니와 황후를 인질로 끌고 간 연나라를 정벌하여 굴복시켰으며, 고구려를 위협하는 초원의 맹주로 부상하는 북위를 굴복시켜 아들 장수태왕시기에는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삼았으며, 고구려를 섬기는 신라가 백제연방국 가야의 침략으로부터 망국의 위기에 빠져 군대요청을 하자 5만의 개마무사를 파견하여 정벌하고 일본열도까지 고구려의 영향권아래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더 이상 주변 국가들로부터 고구려가 침략으로 유린당하지 않겠다는 광개토태왕의 철저한 자주국방 노선에서 가능한 일이였다. 고로 독도와 이어도를 노리는 일본과 지나국을 견제방어하고 동북아 군사적 균형을 이루는 제주해군기지공사는 너무나도 당연하며 반대하는 세력은 이적세력으로 단호히 처벌하고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자주국방은 국가수호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찰갑으로 무장한 기마부대로 대륙을 지배하면서도 수군을 강화하여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했던 광개토태왕은 한반도를 매개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유라시아 정치.경제.군사중심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또한 김대중전대통령의 민족비젼이기도 하였다.
광개토태왕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 좋은 태왕(호태왕)"이라고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배경이다. 광개토태왕이 고구려 최고의 태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광개토태왕의 통치철학과 비젼에 모두가 동의하였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처럼 통치자의 통치철학과 비젼제시는 매우 중요하며, 통합을 가로 막는 내부의 독점세력을 제거하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이다. 내부전쟁이나 외부전쟁이나 통치자는 단호해야 하고 주도적이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대중이 요구하는 진정한 대통령과 정당의 모습이기도 하다. 군소정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명박과 한나라당에게 권력을 상납한 패잔병들에 불과한 친노떨거지들의 권력욕의 수단으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대권후보나 정당은 더 이상 국민대중이 지지하지 않는다. 한나라당과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민주당 중심의 통합을 요구하고 주도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한 이유다. 또한 박정희와 호남을 빨갱이 지역으로 매도한 영남독점주의에 불과한 박정희세력과 대립각을 세워 싸운 김대중같이 음해와 탄압을 받고 고난을 필연적으로 받아야 주목이 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
KOREA족에서 유라시아 대륙과 유라시아 해양을 지배하며 동-서 무역장벽을 무너 뜨리고 하나로 연결하여 인류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몽골제국을 건설한 징기즈칸 태무진이다. 태무진의 선조는 본래 부여족의 갈래로 흑룡강지역에서 강줄기를 따라 몽골초원 오논강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징기즈칸 시대에 몽골을 통합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자랑스러운 KOREA족이다.
KOREA는 마고이후 환인씨가 세운12환국연방의 중심종족으로 황금족이라 할 수 있는 9환족에서 나온 말이다. 9환족이 바로 9려가 된 것이고 구려가 고리.코리가 된 것이고, 이 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왕건의 고려가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서 코리아로 불리우면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호가 된 것이다. 마고족의 후예인 9환족은 환국.배달국.단군조선.부여의 지배세력으로 22색불루 단군천황.해모수.고두막.고추모.박혁거세가 모두 KOREA족이 낳은 해민족의 영웅들이다.
C. R. Bawden이 정리한 징기즈칸 관련내용을 중심으로 징기즈칸이 어떻게 분열된 몽골을 통합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통합하고 지배한 대칸(대한)으로 성장하였는지를 알아 보도록 하자. 미래를 열려면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징기즈칸의 몽골제국 탄생 배경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몽골족 비사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1240경)를 제외하고는 몽골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지나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 야만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지나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지나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지나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지나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초기 징기즈칸의 투쟁과정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