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만에 늦잠이란 걸 잤습니다. 사실 어젯 밤 아홉시가 채 되기 전에 피곤해서 쓰러져 버렸는데, 그 이유는 전날 새벽 세 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 운동을 갔다 오고, 블로그에 글 올리고, 아침엔 아이들 학교 바래다 주고, 아내의 안과 병원 약속 때문에 함께 갔다가 와선 한국의 동생이 부탁한 게 있어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다녀 오고, 그거 사가지고 내려와선 다시 아이들 학교에서 데려와 피아노 학원 데리고 갔다가 데려 오고, 처형네 애들도 픽업해서 피자 두 판 사 먹이고, 성당에서 노래 연습이 있어서 다녀 오고... 그랬는데, 몸이 더이상 말을 듣지 않더이다. 허허.
그러니 몸이 지쳐서 그냥 쓰러졌는데, 아침 다섯시 반 되니 다시 눈이 떠졌습니다. 운동을 가겠다고 또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주섬주섬 챙기다가 오늘이 성당 가는 날이 아니란 걸 깨닫고(생각해보니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더군요) 집안일 하다가 지쳐 응접실 소파에 쓰러진 아내를 방으로 데려다 주고, 저는 그 소파에 앉아서 자다가 여덟시가 넘어 잠에서 깼습니다. 눈을 딱 떴는데, 뭐가 이상하단 느낌이 다 들더군요. 아침에 눈 떴는데 이렇게 창밖이 환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대충 아침을 챙겨먹었습니다. 사과 한 쪽, 포도 열 알 정도, 그리고 어제 먹다 남은 피자 두 쪽과 정말 맛있게 내린 커피... 이거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 커피는 정말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제대로 캐릭터를 내리고 있군요. 확실히 여유 없어서 후다닥 일하러 뛰어나가는 날에 내리는 커피와, 이렇게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이 가능한 날에 만드는 커피와는 차이가 많구나... 하는 생각이 다 듭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아침잠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자가 되고 나서도 밤 늦게까지 취재 나가는 일도 많았고, 또 취재 활동이 끝나고 나서 있는 술자리들에도 꽤 나가야 했고, 그러다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과는 참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지요. 그런데 저를 이런 삶에서 구원해 준 것은 바로 제가 제대로 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우체부가 되면서, 저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각성할 수 있었지요. 반드시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 그것이 몸에 배 버리면서 저는 졸지에 제가 선택하지 않았던, 혹은 제 몸에 각인되어 있지 않았던 '아침형 인간'으로의 재탄생에 성공한 겁니다.
일단 그렇게 생활을 바꾸니 제 삶의 패턴 자체가 달라져 버렸습니다. 몸에 익지 않았던 고된 노동, 하지만, 그 노동 속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 그들의 삶의 색깔들과 어울리는 법도 알게 됐고, 정시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 느끼는 그 피곤함, 그리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나서 느끼는 상쾌함의 질 자체가 틀려진다는 것, 그리고 나서 함께 먹는 저녁과 여기에 곁들이는 와인의 고마움 같은 것을 말 그대로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육체적 노동이 제게 준 선물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제가 당뇨 판정을 받고 나서도 이렇게 빨리 회복되어 다시 정상적인 몸이 된 것도, 제가 규칙적으로 육체노동을 통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이젠 몸이 알아서 제 몸에 좋은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사실, 미국에서 사는 제 친척들 중엔 의사도 있고, 컴퓨터 엔지니어도 있고, 저보다 일찍 미국에 와 자리를 잡은 덕에 그만큼 안정을 이루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과거엔 솔직히 이들을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부러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 모자란 면이나 제 자격지심을 드러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젠 부러움 같은 것은 없고 오히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역으로 깨닫게 될 때도 많은데, 손님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운동하면서 돈 버는 직업이 어딨어?"라고 농을 걸어온 적이 있는데, 그 말도 정말 맞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아름답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주위사람들과 경쟁할 필요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면서, 내 일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웃음과 정을 나누며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일상인, 그런 일로서 제가 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기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제게 뜻하지 않은 선물들도 많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것. 일을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 아마 이런 것들은 제게 주어진 선물 중에서도 가장 큰 선물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일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거겠지요.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제가 그렇게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는 "조셉이 찾아오는 시간이 내겐 가장 빛나는 시간"이라고 기꺼이 말해주는 사람도 여럿 됩니다. 제가 일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그것만으로 이 세상에서 제가 제일 행복한 사람들 중 하나겠다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아, 이렇게 늘어지는 아침, 이제 제대로 박차고 일어나야겠습니다. 아내랑 같이 계속 미뤄왔던 차고 정리도 해야 할 것이고, 집안 청소도 해야겠고... 할 일들은 이렇게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지만, 또 오늘 아침 그런 것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한번씩 늘어져보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이고 기쁨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어서, 제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기쁨입니다. 또 기쁨이어야 합니다. 문득 이런 상황에서 직장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을 수많은 이들의 아픔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기쁨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처음에 제가 우체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저를 아는 이들과 친지들은 실망의 기색도 참 많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일을 기쁨으로 떠 안기 시작했을 때, 그때부터 이 모든 행복이 시작됐습니다. 자기의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행복중에서도 큰 행복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행복은 이 직장이 제게 만족할 만한 보수를 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이 세상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에 합당하면서도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보수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그것은 생산 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욕심을 조금만 덜 부린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참 행복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산 수단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욱 확실하게 적용되는 룰이어야 합니다. 대기업은 그들의 노동자들 뿐 아니라, 그들이 부품이며 하도급을 준 하청기업들에게도 더 많은 몫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청기업들이 다시 그들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몫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윤 창출만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움직임 아래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코스트'의 일부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비정규직' 의 아픔도 더욱 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가장 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지금 세상을 움직이는 규칙처럼까지도 보여주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신자유주의를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으로 삼았던 미국에서는 지금 그것을 제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들은 간혹 제 삶의 주변에서도 보여집니다. 미국의 대표적 할인 도매 마켓인 코스트코의 경우, CEO 가 가져가는 봉급은 일반 직원들의 여덟 배 정도입니다. 똑같은 할인 매장이지만, 월마트는 가장 최저 임금을 받는 사람들과 CEO 와의 봉급 격차가 말할 수도 없이 납니다. 코스트코의 경우, '사원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하여' 시간당 20달러 정도의 봉급을 줍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행복하다'는 것이 보입니다. 반면, 거의 최저 임금 수준을 받으며 일하는 월마트의 종업원들이나, 혹은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