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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엔 이래저래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물론 그 다음날이 일요일이기에 일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해도 편하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월요일이 이곳의 노동절(Labor Day) 이어서 이틀 계속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통근 자체가 편안한것도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평소같으면 45분 이상 잡아야 하는 통근길이 30분이면 충분하니까요. 뻥 뚫린 여유있는 프리웨이(고속도로)를 시속 7-80 마일의 쾌속으로 계속 달리는 것도 토요일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기분이긴 합니다. 출퇴근이야말로 제겐 가장 스트레스 받는 시간임과 동시에, 사색의 시간이 되어 줍니다. 출근길의 자동차는 오롯이 내 공간일수밖에 없고, 바로 그 오롯함은 생각의 원천이 되어 주기에 말입니다.
집의 인터넷이 무슨 이유로인가 소통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 회사에 연락을 해서 고쳐달라고 부탁해놓았고, 일요일 아침 사람이 나와 일찍 와서 고쳐주고 갔습니다. 정말 현대가 어떤 식으로든 소통하지 않으면 그 갑갑함에 버틸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인터넷 불통을 겪어보니 정말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인터넷이 되니 숨을 제대로 쉬는 기분입니다.
비가 무척 내립니다. 시애틀의 가을의 시작입니다. 미국에서는 9월 첫번째 월요일을 레이버 데이라 하여 노동절로 기념합니다. 적지 않은 회사들이 휴무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원래 국제적으로 함께 축하하는 노동절은 메이데이라 하여 5월 1일이지만, 미국만은 유난히 날짜를 바꿔 이런 식으로 기념합니다. 사회주의에 앨러지를 보였던 매카시즘 시대의 유산이지요. 사실, 메이데이의 연원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탄압받은 데서 유래합니다. 1886년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하고 있었고, 그 해 5월 1일,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한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경찰은 이날 파업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습격,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을 살해합니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헤이마켓 평화 집회에서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은 진압봉을 휘두릅니다. 이후 폭동죄로 노조 지도자들이 구속됐고,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던 파슨스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됐습니다. 결국 7년 후, 구속되어 사형까지 받았던 이들 전원이 무죄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1889년, 제 2차 국제인터내셔널은 이들이 총파업 깃발을 들었던 날을 기념해 5월 1일을 노동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은 이듬해인 1890년 각국의 형편에 맞게 메이데이 노동절의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서는 이 날이 사회주의의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엉뚱한 9월에 노동절을 넣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미국에서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모여 바비큐 구워 먹으며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쉬는 날로서 그 의미가 변질됐습니다.어쨌든 이 '미국 노동절'을 기점으로 해서 지금까지 '성수기' 요금을 받았던 호텔이며 항공사는 '비수기 요금'을 적용하게 되고, 사람들은 정신차리고 새로운 계절, 그리고 학생들은 새로운 학년을 맞게 됩니다.
미국의 노동운동사, 그리고 일반경제사, 미국 주도의 세계사란 것이 결국은 광대한 국토와 풍성한 자본, 그리고 풍부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지는 자기 상품들을 팔고자 하는 세계의 시장화의 역사였고, 그 과정에서 미국은 그들의 시장이 되기를 거부하는 곳들의 정치와 역사에 개입했고, 그들에게 '이념의 낙인'을 찍어 왔습니다. 이런 그들의 역사가 정점에 이른 것이 동구를 중심으로 한 현실사회주의 블럭의 붕괴였다면, 그들이 실질적으로 나락에 빠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구소련의 붕괴라 할 수 있으니, 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세대들의 패착도 아울러 보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시작되었지만, 현실사회주의는 그 진정한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사람이 배제된 사회주의, '인간' 이 결여된 진보는 그저 '이론'일 뿐입니다. 구소련의 붕괴도 사회주의에 인간을 실어내지 못했다는 한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최장집 교수 등의 이명박정권을 비판하지 말고 진보 자신을 반성하라는 발언이 혹시 진보에서 인간이 결여됐을 때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간을 최대한 배재한 상태로서 발전해 왔고,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일 것입니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들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할 때부터 사실은 불안했습니다. 우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는 것, 그러니까 경제 중심으로 사고하고, 최고의 효율성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인간은 쉽게 배제됩니다. 거기엔 오로지 '이윤'만이 가치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고, 사람이 뒷전이 된 상태에서 자본주의는 더욱 있는 자에겐 너그럽고 없는 이들에겐 잔인한 제도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경제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경제가 인간을 위해 운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5월 1일의 메이데이든, 혹은 지금 9월 미국의 노동절이든, 이 날들은 바로 '경제'가 아닌 '인간'을 강조했던 사람들의 기념일임엔 확실합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정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결국은 그 이윤 창출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사람이며, 그 '사람'이 '경제활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됩니다. 아무리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그 '국가 경쟁력'이란것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몇몇 대자본들을 위한 경쟁력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국가의 소속 성원들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경쟁력이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인간이 배제된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본다는 면에서 분명 재고되어야 할 시스템입니다.
저는 우체부입니다. 이제 시애틀에서 시작된 우기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거리는 언제나와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일에서 '인간'을 봅니다. 또 '소통'을 느낍니다. 제 일에서 보는 그 수많은 아름다운 모습에서, 저는 제 일이 바로 '인간적인 노동'임을, 그리고 내가 자랑스러운 노동자임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세상의 일원이며, 또 제 주위의 또 다른 '사람'들과 이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문득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노동절 연휴에 푹 쉬고 나서,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