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을 막아 내는 자주국방없이는 평화와 홍익인간도 없다! 자주주권적인 역사의식이 아니라면 나라와 민족을 파는 역사의식에 불과하다!
치우천황은 배달국에 도전한 지나지역의 대표적 제후들에 불과한 유망과 공손헌원의 지나세력을 응징하고 배달국의 통치질서를 바로 잡았다. 이것을 지나인들이 열등감에서 한나라의 사마천은 [사기]에서 치우가 헌원에게 붙잡혀 패배한 것으로 왜곡날조하였다. 그러나, 치우천황의 부하장수 중에 치우비라는 인물이 헌원에게 사로 잡혀 죽었기 때문에 치우천황과 이름이 비슷한 연유로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하여 사로 잡혀 죽은 것으로 오인,왜곡하였다며, 치우천황이 패했다면 진시황과 한나라 유방이 전쟁에 출전할 때 왜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내겠냐며 [환단고기]에서는 명확히 반박하고 있다.
광개토태왕과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를 자주 침략하여 미천태왕의 시신을 도굴하는 만행을 저질렸고 태후와 황후를 비롯하여 고구려백성 5만을 끌고 간 모용선비족(전연)을 응징하였고,고구려 제후국에 불과한 북위을 계승한 수.당나라의 300만 대군의 침략을 고구려는 막아 내야 했다.고구려를 침략하는 백제와 왜의 연합을 응징해야 했다.그래서 대마도(임나)에 고구려연합정부을 세우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통제관리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복속지를 군사적(軍事的)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요지(要地)에 위치한 10개국으로 연립정부를 만들어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는데, [환단고기]에는 이 연립정부가 임나연정(任那聯政)으로 적혀 있다.
그래서 자주국방은 중요하다는 것이다.지나국의 동북공정에 한마디로 반박하지 못하는 8.15이후 소련분국에 이어서 지나국의 분국정권에 불과한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강력하게 응징해야 하는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가 더 이상 침략으로 고통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응징을 위한 정벌전을 20년간 펼친 것이다.
고구려를 침략하고 못살게 굴었던 악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고구려중심의 홍익질서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치권을 부여하고 고구려중심의 통치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인데, 그것이 다시 백제회복을 돕고 훗날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화근이 되었다. 광개토태왕의 통치가 문제였던 것이 바로 징기즈칸처럼 복속지에 대한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자치권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군사력은 세계최강이였기 때문에 제후나 관리를 임명하여 다스리는 직접 통치가 얼마든지 가능했다.
자주국방없이는 평화는 없다.침략시에는 단호한 응징으로 나라와 영토를 수호해야 하는 것이다. 치우천황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유망과 헌원과 같이 군사쿠테타로 헌정질서를 위반하는 박정희.전두환같은 개쌍도조폭양아치 군발이 세력들은 단호히 응징되야 하는 대상들인 것이다.'복지'로 대변되는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념이라는 것도 외침을 막아야 하는 자주국방이 전제되야 하는 것이다. 튼튼한 자주국방과 민족자주정신(경천애인)만이 나라와 민족이 보존되는 지름길이다.
요즘 귀신잡는 해병대가 전우잡는 해병대로 전락하여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군기빠진 당나라 군대라는 의미다. 단결하는 군대! 승리하는 군대!를 만드는 비결은 상하계급간에 상관들은 부하들을 자식처럼 아우처럼 따뜻하게 보살피고 부하들은 상관들을 형님처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존경하고 따르는 골육지정을 전제로 전쟁에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이기겠다는 필사즉생의 군인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극상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ㅈ집단따돌림이라는 '기수열외'는 군기문란사태라 할 수 있다. 속히 바른 군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압록강지역).백제(한강)신라(경주).가야(김해) 4국이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다는 어불성설한 논리를 펴대는 자들은 사료자체도 이해하지 못하고 종합적으로 분석못하고 지나국의 동북공정를 돕는 역사논리를 펴대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엄연히 마한(마조선=한반도지역)지역에서 나라를 세우고 다물(담로)을 국시로 지나지역으로 진출하여 지나대륙을 평정한 고구려.백제를 지나대륙에서 개국해서 한반도지역으로 진출했다는 논리를 펴게 되면 지나국이 한반도를 지배해도 된다는 역사논리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왕족과 귀족들이 묻혀 있는 마한인들의 토착무덤양식인 적석총을 수용한 고구려 적석총(피라미드)은 압록강지역에 산재되어 있고, 또한 서남해 토착마한인들의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을 수용한 백제초기 왕족무덤인 전방후원분은 한강지역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일본열도에 산재되어 있다. 한강지역의 초대형 전방후원분들은 왜 무덤이 아니라면서 발굴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뉴라이트와 함께 친일식민사학자들이 아직도 득실거린다는 반증이다.
한강지역의 초대형 전방후원분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일본이라는 나라자체가 백제의 분국이였다는 사실이 만 천하에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녕왕릉이 증명하듯이 백제후기무덤은 내부를 벽돌로 짓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바뀌었고, 초원문화를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 온 흉노선비 신라왕족무덤들은 경주지역에 산재되어 있다.그리고 초원문화를 없애고 농경문화를 정착하기 시작한 법흥왕때부터 적석목곽분의 규모가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축소되어 신라인들에게 법흥대왕이라 칭송받았던 법흥왕의 무덤이 매우 작아진 배경이다.
이런 고고학적 사료를 무시하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다는 일부 정신나간 재야사학자들 또한 지나국의 동북공정에 이바지하는 광우병환자들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근세 조선이 지나대륙을 차지하며 존재했다는 역사논리또한 명.청나라가 100년전까지 지나대륙을 통치했다는 일반적인 지나사에 반하기 때문에 코메디 역사논리라 할 것이다.100년전 근세조선의 영토는 마라도에서 연해주까지 남북4천리의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서양제국주의가 발호할 때 늦게나마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취임하며 밝힌 대한제국 선언문에 나오는 영토관련 내용이다. 왜 사람들은 그런 어불성설의 역사논리로 시간낭비 인생낭비를 하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환단고기-고구려 본기]왜(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해상세력)는 백제의 보좌(지원세력)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양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 왜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위 그림들은 6세기에 그린 양나라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국 사신(왼쪽)과 왜국 사신(오른쪽) 그림입니다. 양직공도는 당시 양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절들에 대해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