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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나라도 크고, 따라서 많은 민족들이 주도권을 놓고 다툰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킨다면 크게,황하(黃河)지역을 기반으로 일어선 북방민족 및 그 문화와,장강(長江: 양자강)유역을 기반으로 하는 남방민족 및 그 문화로 크게 대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두 문명은 하나의 나라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민족, 언어, 사람들의 기질 및 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이질적입니다.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최초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난 뒤,쓰는 글자가 소전체(小篆體)로 통일됨으로서 비로소 문화적으로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지만,최근까지의 역사를 보더라도 북경(北京)지역 및 상해(上海)지역간 이따금 표출되는 갈등은 매우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본격적인 역사는 주(周)나라로부터 시작되는데,주(周)나라가 황하(黃河)의 지류인 위수(渭水)지역, 지금의 서안(西安)지역 부근인 호경(鎬京)에 도읍을 자리 잡으면서부터 중국을 황하문명(黃河文明)이 지배하는 시기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도 남쪽 양자강유역에는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장강문명(長江文明)이 있었으며,이들은 북방의 황하문명(黃河文明)과는 민족도, 언어도,심지어 문화도 다른 별개의 문명권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1973년 발굴된 절강성(浙江省) 녕소(寧紹)평원의 하모도(河姆渡) 유적에서는,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축물 및 벼농사의 흔적 등이 발견되어,북쪽 황하문명과는 별도의 장강문명(長江文明), 또는 양자강문명이 존재하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周)나라 이전인 하(夏)왕조의 우(禹)임금이 여기를 지배하고 나서부터,이곳이 황하문명(黃河文明)인 한(漢)민족이 지배하는 곳으로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나 이들 남방민족은 북방민족인 주(周)나라에 대해서 항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따라서 주(周)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춘추시대(春秋時代)로 접어들자 남방 장강문명(長江文明)의 맏형격인 초(楚)나라는 스스로를 왕(王)이라 일컫기 시작합니다.
당시 주(周)나라만 스스로를 왕(王)으로 칭하고, 나머지 주(周)를 보필하는 제후들은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南)’의 칭호를 하사받아 각자 불리었습니다.비록 당시 제후국 중 초(楚)나라가 땅은 가장 넓었지만 미개한 남방지역이라 하여,주(周)나라는 제후국의 5가지 등급중 네 번째 등급인 ‘자(子)’의 칭호를 내립니다.
그러나 초(楚)나라는 북방계인 주(周)나라의 제후국임을 거부하고 주(周)나라와 대등한 왕(王)의 칭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사기(史記)에 기록된 초(楚)나라가 강성했던 장왕(莊王) 8년때의 일입니다.초(楚) 장왕(莊王)이 세력을 키워 강성해지자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천자국인 주(周)나라 도읍 낙양(洛陽)에서 열병식을 거행함으로서 주(周)왕실에 대한 일종의 시위행사를 합니다.
당시 주왕(周王)인 정왕(定王)은 대부(大夫) 왕손만(王孫滿)을 칙사로 보내 장왕(莊王)을 위로했는데,장왕(莊王)은 “주(周) 왕조에 있는 전래의 보물 구정(九鼎)은 꽤 큰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무게는 얼마나 나가는지 알고 싶소이다”라 말하며 정(鼎)의 무게를 물어봅니다(八年,伐陸渾戎,遂至洛,觀兵於周郊。周定王使王孫滿勞楚王。楚王問鼎小大輕重).
이 정(鼎)은 고대의 성왕(聖王)인 순(舜), 우(禹) 시대에,당시의 중국 전국에 있는 구주(九州)로부터 구리를 모아 주조한 것으로,이후 대대로 전승되어 온 천자국(天子國)의 상징인 보물이었습니다.장왕(莊王)은 그 정(鼎)의 무게를 물어 봄으로서 허약한 주(周)가 그 정(鼎)을 가질 수 없고 남방계인 초(楚)나라가 천자국(天子國)인 주(周)를 대신하여 가지겠다는 뜻을 은연중 물어본 것입니다.하지만, 제(齊)나 진(晋)등 북방계의 반발을 생각하여 실천에 옮기지는 못합니다.중국 역사상 최초로 잠시 나타나는 남방계의 북방계에 대한 힘의 우위 장면입니다.
춘추시대 말엽, 다시 천하의 패자가 된 남방 월(越)나라 왕(王) 구천(句踐)에게 주(周) 왕실이 내린 칭호는
겨우 한 등급 올린 ‘백(伯)’의 칭호였습니다.사기(史記)를 보면, 공자(孔子)가 자신의 제자인 자공(子貢)을 당시 월(越)나라에 파견하는데,이때 구천(句踐)은 직접 나서서 자공(子貢)이 지나게 될 길을 청소하게 하고,몸소 마중을 나와 직접 수레를 몰며 자공(子貢)을 숙소까지 안내한 후,“이곳은 오랑캐 나라(蠻夷)인데 대부(大夫)께서 무슨 일로 몸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越王除道郊迎,身禦至舍而問曰:「此蠻夷之國,大夫何以儼然辱而臨之?」)라고 극진히 말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따라서 초(楚)나라가 장왕(莊王)때 스스로를 왕(王)으로 칭하고 무력행사도 합니다만,대체적으로 춘추시대까지는 남방계가 북방계에 대해 스스로를 오랑캐라 칭하는 등,문화적 면에서의 열등감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들어가면서 사라집니다.
이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북방계인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곧 남방 초(楚)나라 출신인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에 의해 멸망당합니다.이후, 초(楚)나라 출신인 유방(劉邦)에 의해 한(漢)왕조가 세워져,비로소 남방계와 북방계를 아우르는 한족(漢族) 개념이 탄생됩니다만,이후 한(漢)이 망하고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조조(曹操)가 이끄는 북방의 위(魏)나라와,손권(孫權)의 남방 오(吳)나라간 갈등으로 재연됩니다. 어찌 보면,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이 두 문명 간 벌어진 가장 상징적인 전투로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중국 역사상 두 문명 간의 갈등은, 유구한 역사를 두고 이후로도 계속 합쳐졌다 갈라서다를 반복하며 내려갑니다. 이 두 문명은 생활환경부터 완전히 달라서,예컨대 북방민족은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 말(馬)인 반면,남방민족은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 배(舟)입니다. 중국에서 나오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운데,말(馬)과 관련된 성어(成語)들, 예컨대 ‘새옹지마(塞翁之馬)’, ‘주마간산(走馬看山)’등은 모두
북쪽에서 유래한 것이며, 반면에 배(舟)와 관련된 성어(成語)들,예컨대 ‘각주구검(刻舟求劍)’, ‘오월동주(吳越同舟)’등은 모두 남쪽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당시, 수전(水戰)경험이 많지 않던 조조(曹操)의 위군(魏軍)들이,배를 서로 묶어 널빤지로 연결한 후, 말(馬)을 실어 도강(渡江)하는 장면이 나오는데,바로 이 장면이 이러한 두 문명 간 생활관습,나아가 전투의 방식까지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상적으로도 차이가 큰데, 북쪽지방은 노(魯)나라 출신인 공자(孔子)의 유교(儒敎) 가르침을 따라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중시하며,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잘 따지는 반면,남쪽지방은 초(楚)나라 출신인 노자(老子)의 도교(道敎) 영향이 커서 허례허식(虛禮虛飾)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周)나라의 기원은 후직(后稷)이란 사람으로, 이름이 ‘기(棄)’라 하였다고 하는 등 구체적이어서 비교적 신화적 요소가 낮지만, 초(楚)나라는 오제(五帝)의 한사람이며 전설상 황제(黃帝)의 손자인 전욱(顓頊)을 시조로 삼고 있어 신화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유행한 노래를 보더라도, 주(周)나라에서 불리던 노래는 시경(詩經)에서 정리되어 있는 비교적 엄격한 4언체(四言體)를 유지하는 반면,초사(楚辭)라 불리는 초(楚)나라의 노래는 4언, 5언, 6언, 7언 등이 뒤섞여 있는 자유분방한 형태이며,특히 거의 매 구절마다 “~혜(兮)”라는 발어사(發語辭)가 들어가 있어,북방계통의 노래와 매우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한자(漢字)들은, 사람의 각종 예식에 입는 복장을 나타내는 글자,각종 제사에 사용되는 그릇들을 각기 달리 나타내는 글자등 주로 예식과 관련된 글자가 많은 반면, 초사(楚辭)에 압도적으로 많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