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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과 세계인의 추모속에 영면에 든 한국현대사의 거목 김대중
초인적 의지로 병마에 맞서 싸우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기도와 눈물로 쾌유를 빌던 수많은 국민과 세계인들을 뒤로한채 2009년 8월18일 오후 1시43분 향년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국민의 정부 후계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진 서거하였을때 비통함을 금치 못했던 김 전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떠난지 87일만에 같은길을 따라간것이다.
이제 김 전 대통령은 서거후 열화같은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직 대통령 최초로 국장으로 엄수되어 8월23일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됨으로써 우리곁을 떠나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국장기간중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장쩌민 전 중국 주석,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고이즈미 전 일본 수상 네스타 노벨위원회 사무총장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고 김정일위원장의 특사 조의조문단을 비롯 미국,중국,일본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언론들도 서거및 국장 소식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100만여명에 이르는 국민들 또한 전국 184개 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업적을 추모하고 영결식장과 서울광장에 각각 2만여명이 그리고 영구차가 지나는 도로변에 수십만명의 시민들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운집하여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길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폐렴증세로 세브란스에 입원하였을때만 해도 국민들은 인동초 같은 강인한 의지로 수많은 역경과 고난,사선을 극복한 불퇴전의 초인적인 삶을 살아온 김 전 대통령이기에 비록 고령이지만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여 이땅의 민주주의,서민대중의 민생문제,남북평화를 위해 소금과 등불의 역할을 더 해주실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삶의 끈을 놓아 버리자 국민들은 충격과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앞서 언급한 바처럼 국장기간동안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각계인사,일반국민들은 물론이고 세계각국의 유명인사들과 언론이 앞다투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기원하였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이처럼 국내는 물론 세계인들을 추모 분위기에 휩싸이게 만든것은 김 전 대통령이 살아생전 온갖 역경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민족화해와 세계평화에 대한 신념을 행동하는 양심을 통해 일관되게 실천하여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거듭 되돌아보건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마디로 한국 현대사에 영구불멸의 큰 족적을 남긴 정치거목이요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구출해낸 말그대로 구국적 영도자라 할 수 있다. 또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이며 노벨 평화상 수상이 말해주듯 민주인권 평화에 일생을 바친 세계적인 민주인권평화 지도자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라는 인생최후의 순간마저도 북측의 최고위 특사조의조문단을 불러들여 파국상태에 빠져있던 남북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도록 마지막 선물을 남겨 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이러한 업적과 거대한 발자취는 도전과 탄압,좌절과 재도전,백절불굴의 신념과 용기,승리와 패배라는 치열하고 파란만장했던 삶의 빚나는 결정체다.
지도자 자질 보인 총명했던 유년시절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전과 응전,영광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역정은 한편의 인간신화요 드라마라 아니 할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인 음력 1923년 12월 (양력 1924년1월6일 )전남 도서벽지인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섬마을에서 소작농과 뱃사람을 대상으로 객주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부친 김문식씨와 모친 장수금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의도는 목포에서 뱃길로 세시간 거리인 150리 떨어진 섬으로 어업외에도 농사를 많이 지어 식민지 시절 일제의 수탈이 심하여 농민들의 소작쟁의 운동이 벌어졌던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당적 비판의식과 정치에 대한 집념은 어린시절 일본인들의 수탈에 항거하여 섬주민들이 일으킨 소작쟁의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생긴 항일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서거 4개월전인 2009년 4월 마지막으로 고향 하의도를 14년만에 방문,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김 전 대통령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아호를 고향마을 이름을 따 '후광(後廣)'으로 지을만큼 고향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시절 김 전 대통령은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학교가 생기기전에는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34년 4년제 하의 공립보통학교가 생기자 동생과 입학,부급장,부조장등을 맡으며 뛰어난 리더십과 함께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아들의 재능이 남다르지 않음을 알게된 부모가 4학년이 되던 1937년, 재산을 모두 팔아 목포로 옮겨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목포 제일보통학교(현 북교 초등학교)로 전학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졸업후 당시 전국 10대 명문안에 들었던 5년제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중반기까지는 1,2등을 다투는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재학중 김 전 대통령은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았으며 웅변,연설에도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데다 반일작문이 문제가 돼 계속 맡아오던 반장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하면서 당시 명문대였던 만주 건국대에 응시하였으나 서류전형에서 낙방하자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재수를 포기하고 인본인이 경영하는 목포 상선회사에 취직하였다. 목포상고 4학년때 호적상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3일로 고친것도 징용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청년 실업가로 급성장한 해방정국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차용애씨와 결혼한데 이어 청년 실업가로 급성장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당시 스무살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근무하던 일본인 소유의 상선회사가 귀속재산이 되자 목포상선회사 경영 관리에 이어 재산관리인을 거쳐 11월 대표로 선정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목포상선 관리인을 맡으면서 해운사업가로 일취월장하게 된 김 전 대통령은 여세를 몰아 전남선박 목포조합장,대양조선 사장등을 거쳐 1948년 부터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겸 주필을 맡아 2년동안 신문사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만서른이 되기전인 1951년3월 흥국해운의 정식대표가 됨으로써 목포지역의 성공한 청년사업가로 입지를 굳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해방후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얼마가지 않아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은데 실망하여 탈퇴하였다. 이때 건준 참여 경력은 정치인생 내내 정적과 보수세력 들로부터 빨갱이등 색깔론 공격에 악용되는 빌미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죽을고비를 맞기도 하였다. 김 전 대통령이 늘 말해왔던 네번째 죽을고비중 첫번째 였다. 서울 출장중에 6.25를 맞은 김 전 대통령은 20일동안 걸어서 목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목포로 돌아온지 이틀만에 자본가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반동 분자로 몰려 우익인사들과 함께 목포감옥에 수감되었다. 2개월간의 수감기간중 총살당할 뻔한 위기가 닥치자 감옥문을 깨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그동안 일으켜 놓았던 해운업은 전쟁으로 망하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사업이 망하면서 정치가 문제라는 의식을 갖게 된 김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국민이 편안하도록 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김대중
이러한 상황하에서 1954년 임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