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 사당 무후사에 안치되었는 공명 오늘은 나관중(羅貫中) 삼국지(三國志)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란 인물을,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기술및 그가 남긴 <출사표(出師表)>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관중(羅貫中)은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사람입니다. 당시, 명(明)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은 몽고족이 지배하였던 원(元)의 역사를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이 건국한 한족(漢族)의 나라인 명(明)나라에 대한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중국 역사 중 같은 한족(漢族)이 건국했던 한(漢)나라를 모델로 삼고, 그 정통을 어슬프게나마 이어받은 촉한(蜀漢)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역사 만들기’에 주력합니다.
일종의 ‘촉한공정(蜀漢工程)’인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삼국(三國)당시 지금의 주(州)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던 익주(益州: 蜀)의 주목(州牧)에 불과했던 유비(劉備)와 그의 종사(從事)에 불과하였던 제갈량(諸葛亮)이 이러한 ‘역사만들기’의 최대의 수혜자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갈량(諸葛亮)은 실제로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당시의 지식인 중에서는 Minority에 속하는 지식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조조(曹操)는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천하의 인재를 광범위하게 구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얼마나 자신이 인재를 구하는데 목말라 했는가가 자신이 지은 詩, <단가행(短歌行)>에 구구절절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위서(魏書) 무제기(魏武紀)>에는 제갈량(諸葛亮)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어, 당시로서는 위(魏) 무제(魏武) 조조(曹操)의 인재 List에는 올라가 있지 않은 Minority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둘째, 훌륭한 정치가였지만 군사적으로는 별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의 말미에 그를 평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評曰:諸葛亮之為相國也,撫百姓,示儀軌,約官職,從權制,開誠心,布公道...可謂識治之良才,管、蕭之亞匹矣。然連年動眾,未能成功,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평하여 말한다. 제갈량이 재상이었을 때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의궤를 보이고, 관직을 줄였고, 권위와 법제를 따르고, 성실한 마음을 펴고, 공평하고 올바른 도리를 베풀었다...그의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능력 면에서는 옛날 관중(管仲), 소하(蕭何)에 버금간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매해 군대를 동원하면서도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아마도 변화에 응하는 군사적 전략 면에 있어서는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정사(正史)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수행한 전쟁은 작은 전력과 싸워서는 승리를 하지만 큰 전력과 맞붙어서는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이긴 전쟁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손권과 담판을 지어내어 적벽에서 연합전력을 이루어 승리하여 형주의 4군을 얻고, 유장(劉璋)으로부터 뺏은 촉(蜀)을 5년도 채 되지 않아 안정시키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그는 끝까지 원칙을 고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지식인이란 곧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요즘 말로하자면 이름이 좀 알려지고 나면 어느 회사로 옮기든지 더 높은 연봉을 받을수 있으면 옮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유비(劉備)와의 충성을 지킵니다. 그런 그에게 유비(劉備)는 임종직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先主於永安病篤, 召亮於成都, 屬以後事, 謂亮曰 :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 終定大事. 若嗣子可輔, 輔之; 如其不才, 君可自取. 亮涕泣曰 : 臣敢竭股肱之力, 效忠貞之節, 繼之以死 (선주(先主: 유비)는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지자 성도(成都)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선주(先主)가 말하길: “그대의 재능이 위(魏) 조비(曹丕)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大事)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나의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재능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 스스로 나라를 취하도록 하라.”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고하길: “신(臣)이 감히 온몸을 다해 충성을 바치며, 죽음으로서 후계를 보살피겠나이다.”하였다)
정말 놀랄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군주가 신하더러, 자신의 아들이 군주의 재목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그대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라고 얘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글은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이란 인물간에 맺어진 인간적 신뢰감이 어느 정도였던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런 유비(劉備)와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의 유지(遺志)인 ‘흥한(興漢)’을 이루기 위해 무리를 무릅쓰고 나중에 북벌(北伐)의 길에 오릅니다.
당시 국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촉(蜀)이 위(魏)를 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음에도, 그가 북벌(北伐)에 나선 것은 얼마나 그가 원칙에 충실하였던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입니다. 현실적 정세판단에 뛰어난 정치가였던 그가 이런 무리한 북벌(北伐)에 나서면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그의 죽음을 각오한 비장함을 표현한 글이 바로 천고(千古)의 명문(名文)인 <출사표(出師表)>입니다.
臣亮言: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今天下三分,益州疲弊,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衞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蓋追先帝之殊遇,欲報之於陛下也誠宜開張聖聽,以光先帝遺德,恢宏志士之氣;不宜妄自菲薄,引喻失義,以塞忠諫之路也。 (신(臣) 제갈량(諸葛亮)이 말씀드립니다. 선제(先帝:유비)께서 나라를 세우시다가 절반도 안되어 중도에서 붕어(崩御)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 있으나, 익주(益州: 蜀)가 홀로 쇠약해지니, 지금은 진실로 나라가 위급존망한 때입니다. 그러나 모시는 신하가 안에서 게을리 하지 않고 충성스러운 장수가 밖에서 목숨을 던지고 있는 것은, 바로 선제(先帝)에게서 받은 특별한 은혜를 지금의 주상(主上)께 갚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성스러운 귀를 크게 열어 이로써 선제(先帝)의 유덕을 밝게 하여 뜻있는 인사들의 기개를 넓고 크게 펼치도록 할 것이요, 망령되이 스스로 가벼이 하시며, 옳지 않은 비유를 끌어 의리를 잃으심으로써, 충성으로 간하는 길을 막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
출사표(出師表)의 첫머리에서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신하가 아닌 마치 스승의 입장에서 천하정세의 위급함과,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행동을 가벼이 하지 말 것과 충간(忠諫)을 막지 말라는 가르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유비(劉備)와의 만남을 회고하고, 유비(劉備)의 유언(遺言)인 ‘흥한(興漢)’의 명을 한날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으며, 이제 드디어 유지를 받들어 북벌(北伐)에 나서게 되었다는 자신의 출병(出兵)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이 무모하다는 여론이 빗발쳤으나 원칙론자인 그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으며, 그는 상소문에서 그의 출병에 대한 당위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臣本布衣,躬耕於南陽,苟全性命於亂世,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遂許先帝以驅馳。後值傾覆,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爾來二十有一年矣。先帝知臣謹慎,故臨崩寄臣以大事也。受命以來,夙夜憂探,恐託付不效,以傷先帝之明,故五月渡瀘,深入不毛。今南方已定,兵甲已足,當獎率三軍,北定中原。 (신(臣)은 본디 삼베옷에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을 갈며, 구차하게 난세에 생명을 보존하면서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고 영달하게 되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제(先帝)께서는 신(臣)을 비천하다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몸소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초가집 속으로 신(臣)을 찾아오셔서 신(臣)에게 당시의 일을 자문하시니, 이런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