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의 <승무>는 전 국민이 애송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에서 표현한 대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나비처럼 곱게 차려 입고 그 위에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길다란 소매를 허공에 뿌리며 추는 승무는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종교적인 경건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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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명무 중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로 꼽히는 이매방 명인은 자신의 승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이 깨져서 중이 되었는디, 수도를 하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고 속세가 그리워 가슴 속에 왼갖 번뇌가 떠오른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걸 참다 못해 그 울분, 한 이런 것을 춤이나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소할라고 추는 춤이 바로 승무라.”
불교적인 용어로 멋있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기원하는 수도승의 내면 세계를 묘사한 춤이라는 말이 되겠지만, 그런 어려운 말보다 그의 말이 훨씬 현실감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192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뒤,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승무를 비롯한 전통 무용에 젖어 살아왔고, 특히 승무에서의 북춤은 제일인자라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 춤에 뼛속 깊이 통달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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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 춤이나 타고 나야지 억지로 하면 안돼요. 관중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간에 그 사람들을 잡았다 놨다 험서 관중들 오장을 속속들이 후벼 놓고 울려 놔야 명창이니 명무니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명창이 되고 명무가 될 수 있나요?”
스스로 자신의 춤이 명무라고 자부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눈 팔지 않고 춤 속에서만 살아 온 자기 인생에 대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지닙니다.
“세 살 때부터 누님들처럼 머리 땋고, 쪽 찌고, 머리 틀고, 치마 저고리 입고, 거울 앞에서 춤을 췄다니까 말해서 뭘 해요. 자라면서 남자애들하고는 안 놀고 맨 여자애들하고 소꿉장난하고 놀았어요. 주위에서는 이씨 가문에 만고에 없는 굿쟁이가 나올랑갑다 하면서 걱정들을 했지요.”
과연 주위에서 걱정한 대로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 몰래 전라남도 목포 권번에서 이대조 명인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대조 선생이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대까지 무업을 해 오다가 아버지께서 무업을 끊고 일체 자식들에게 그 일을 못 하게 했는데, 내가 다시 그 업을 이어받은 거지요. 그러니 피는 못 속이나 봐요.”
할아버지에게서 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허튼춤’을 배운 뒤에 광주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광주 권번에서 박영구 명인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이창조 명인에게 검무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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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와서 알게 된 건데 승무로 치면 내가 5대째라는 거예요. 맨 처음 승무를 창시한 분이 신방초 선생이고, 그 다음 이정선 선생, 그 다음이 김금옥 선생이고, 김금옥 선생의 제자로 한성준 선생과 박영구 선생이 있는데 한성준 선생 밑에서 한영숙 씨가 나오고, 박영구 선생 밑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지요."
승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인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확실하게 단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신방초 명인이 승무의 창시자라는 설은 문헌의 고증이 없으니 다만 원로 무용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계보를 추정해 올라갈 때 제일 ‘웃어른’으로 꼽히는 명인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무난할 듯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계보를 거쳐 전해진 승무를 그는 박영구 명인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배웠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춤을 추시고 소리북도 잘 치시는 멋쟁이였어요. 그런데 발을 약간 절어요. 그래도 춤추면 발을 저는지 몰라...
우리 선생님이 북을 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레를 타다가도 어깨춤을 절로 추곤 했으니께. 그 북가락을 내가 배우는디 참 배우는 방법이 옛날 식이라. 선생님이 북도 내주지를 않아서 함부로 칠 수도 없고, 감나무 가지 꺾어서 만든 북채를 가지고 입으로 몇 가락 배운 것을 돌담에서 혼자 돌을 두드림서 연습을 혀.
그러자니 손등이 벗겨지고 굳은 살이 박혀요. 다른 기생들은 힘들다고 다 집어치웠는데 나는 끝까지 버텼어. 선생님 눈치 봐서 기분 좋을 때 한 가락씩 사흘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그렇게 동냥하다시피 가락을 배웠어요. 요새 사람들이 들으면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허지만 그렇게 배운 거라서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게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배운 그의 북은 그 가락의 다양함이나 기교의 뛰어남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승무를 출 때는 누구나 ‘천수북’이라고 불리는 북을 앞에 놓고 북채 두 개로 ‘구래’라고 불리는 가죽 부분과 ‘변죽’이라 불리는 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북춤을 춥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북춤 속에 엄청난 가락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박영구 명인과 함께 서울에서 활동했던 명무 한성준은 승무나 학춤뿐만 아니라 소리북 잘 치기로도 당내에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의 북춤가락도 박영구 명인에 견주면 '재산이 많지 않다.'고 평가됩니다.
북춤의 ‘구정놀이’ 라고 부르는 여러 가락과, ‘세산조시’라고 부르는 휘모리의 여러 가락들은 농악 장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풍물의 꽹과리 가락이나 장구 가락 그리고 북가락 등을 북채 두 개로 두드릴 수 있게 변화시킨 가락들이 대부분입니다. 거기에다 이매방 명인은 ‘엇머리’ 장단을 새로 창작하여 '재산'을 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북춤을 한번 보고 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북 가락은 싱거워서 들을 맛이 안 난다고 할 만큼 사람의 속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북춤 추는 시간이 삼 분에서 오 분 사이인데 남이 볼 때는 시원하고 쉬운 것 같아도 거기에다 엇붙임, 잉엇거리 같은 어려운 기교를 마스터 하려면 십 년 공부는 해야 돼요.”
그 역시 그 어려운 공부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공업학교 건축과에 다닐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열네 살에 명창 임방울이 주최한 명인 명창 대회에서 승무를 춘 뒤로 학교에서나 주위에서 ‘춤추는 머시마’라고 놀려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춤만 추었습니다.
그런 일과 함께 그의 성격은 더욱 더 여성화되어 갔고, 그 기질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한국 춤은 여자가 추어야 제 맛이 나고, 남자가 추더라도 여성적인 태도가 우러나야 그 맛이 제대로 난다.” 고 하며 여성화된 춤의 미학에 대해서 확고한 지론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탈춤이나 농악을 출 때의 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승무나 살풀이를 추는 남자 춤꾼들의 거의 모두가 여성화되어 있고 여성화되지 않은 춤꾼이라도 씩씩하고 활발한 남성적 정서보다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적 정서를 위주로 춤을 추는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우리 무용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히기도 합니다.
“한국 춤은 덜렁이 왈가닥은 못 춰요.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하고. 어딘가 애원이 깃들어 있고, 눈에 색이 흐르고, 그 눈에 변덕이 죽이 끓듯 하면서 온갖 감정을 나타내고, 슬프고, 아름답고, 어여쁘고, 수심이 가득 차고, 곱게 빗은 머리에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가 살짜기 흘러 내려오듯이 교태가 있어야 그 춤이 제 맛이 나는 디 덜렁이 왈가닥이 어떻게 그 춤을 추어요?
장삼을 날리면서 그늘을 저어서 한을 만들어내고 고깔을 좌우로 놀려서 온갖 하소연을 해야 하는디, 요새 춤추는 사람들 보면 구르고 넘어지고 몸부림치고 가랑이 쩍쩍 벌리고 궁둥이 흔들어대니 그게 춤이에요? 지랄 염병하는 것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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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대장’, ‘직사포’, ‘깡패’, '따발총‘이라는 많은 별명에 어울리게 그는 눈에 거슬리는 춤에 대해 매섭고 혹독한 비평을 큰 소리로 얘기했습니다.
문제야 어떻든지간에 그는 더욱 더 여성화되어 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을 따라 북경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최근에 첸 카이거 감독이 만든 <매란방>이란 영화로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중국의 전설적인 무용수 '매란방'에게 무용을 잠깐 배웠습니다. 그 뒤로 그는 매란방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을 만큼 깊이 빠졌습니다.
“매란방하면 우는 아기도 그친다던 유명한 무용가인데 남자에요. 기가 막힌 미남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여자 역할만 맡아서 여자 춤을 추면 여자고 남자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린다니까요. 오죽하면 일본 천황이 반해서 자기 앞에서 춤을 추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까요. 중국 평민들은 얼굴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이 공연하면 황제 귀족들만 와요.”
해방이 된 뒤에 목포 권번의 무용선생으로 있던 시절,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 기생들한데 “뚜드려 맞기도” 많이 하다가 악극단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창공’이라는 단체를 따라다니며 밴드반주에 맞춰서 승무를 추기도 했습니다.
그뒤 광주 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 공작반의 무용단 단장이 되어 전남 일주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고, 임방울이 만든 단체를 따라다니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6.25 직후에는 육군 군예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부산 유지들의 권유를 받아 부산 국악원의 무용강사 노릇을 하는 따위로 쉴 새 없이 떠돌아 다니며 춤을 췄습니다.
그러면서 북을 하나 놓고 치는 전통적인 '외고' 형식을 나름대로 바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1948년에 임방울이 목포역전 가설극장에서 명인 명창 대회를 열었을 때는 북을 셋 놓고 치는 '3고'를 선보였고, 1953년에 전라북도 군산에서 국악원 주최로 명인 명창 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9고'를 선보였습니다. 1954년에는 서울 계림극장에서 ‘삼성 여성 국극단’의 창극에 특별 출연하여 '7고'를 선보였으며, 1955년에는 광주극장에서 ‘이매방 무용 발표회’를 열어 '5고'를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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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방에서 북춤들을 많이 추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놨으니까 하는 얘긴데, 외고나 삼고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하지만 오고나 칠고, 구고, 십일고로 넘어가면 예술적인 면보다는 쇼적인 면이 강해요.”
젊어서 쇼무대에 나섰더라면 떼돈을 벌었을 터이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본격 무대에서만 춤을 춰 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그뒤로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면서 무용 발표회를 열고, 외국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해외 공연을 하고, 국내의 중요한 무용 공연에는 어김없이 출연하면서 그 명성을 높여 이제는 웬만한 춤의 문외한도 승무와 이매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지위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재운은 신통치 않아서 궁색한 살림살이밖에 남은 게 없다는 그이지만 돈과 처세에 무능한 자신의 성격을 별로 탓하는 기색도 없습니다.
“어느 기자가 어떤 무용과 교수 집에 한번 갔다가 뒤로 넘어지게 놀랐대요. 그 집이 대통령 집보다도 더 으리으리하고 궁궐 같았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집에 와서 보고는 또 한번 놀랐대요. 그 집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고 가난해서 그랬대요. 그래도 나는 웃어요. 어수룩한 예능계에서 남 등쳐먹고 돈 벌어서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무용심사다 대학 입학이다 할 때 엄청난 돈이 왔다갔다 하고 나도 그럴려면 그럴 수 있어요. 허지만 난 못 해요. 그게 어디 예술가입니까. 사기꾼 날강도지.”
울분만 끓어오르면 술을 마시고 직사포처럼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해대는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고 몸도 많이 상한 그는 그 좋아하던 술을 딱 끊어버렸습니다. 술을 끊으니 성격도 변해서 남의 욕도 덜하게 되고, 제자들 가르칠 때에도 예전처럼 무섭고 사납게 굴지 않고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 신식 문물보다는 옛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노래도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좋아합니다. 신식 노래라고 해야 겨우 고복수, 황금심,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정도이고, 요새 노래에는 아예 귀도 열지 않습니다.
“춤도 그래요. 원형과 기본을 버려서는 안돼요. 아무리 창작도 좋지만 어떻게 한국 춤의 기본이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태권도 같은 현대 무용으로 변합니까? 창작을 하더래도 원형을 지켜 가면서 조금씩 해야지... 요새 젊은 무용가들의 춤을 보면 이게 춤인지 지랄발광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렇듯 고직식하다 싶을 정도로 옛것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도 요새 와서는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너무 바뀌어서 도무지 그의 고집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새 대학생들은 승무 추면 다 졸아요. 승무에서 염불 장단이 제일 멋있고 춤도 맛이 진진한 법인데, 염불 장단만 나오면 다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북을 치면 그때야 박수가 나와요. 요새는 뭐든지 빠르고 미친 놈처럼 흔들어대야 좋아하니 원춤대로 추다가 손님 다 가 버리고 나 혼자 추면 뭐 해요?”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춤 추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런 걱정과 한을 오로지 춤을 추며 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쓸쓸해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얇은 사 하이얀 고깔'로 춤을 출 때 왜 그토록 격렬하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애닯고 슬픈 울림을 주는지 조금은 알 듯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