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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구정은 기자가 운영하는 '딸기의 오들오들 매거진' 블로그에서 38년전 북아일랜드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 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울컥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사건에서 광주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사참조 http://ttalgi21.khan.kr/2878)
아일랜드의 억압의 역사는 어쩌면 그렇게 가혹할 정도로 남도의 그것과 닮아 있을까요. 미국이 이민의 문호를 연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이지만, 아이리시들은 당시 이민 사다리에서 제일 하층에 이태리 인들과 동구계들과 함께 자리매김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앵글로 색슨 백인 프로테스탄트 (WASP)' 들로 구성된 최상층엔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청교도 출신의 이민자들이 있었고, 가장 최하에는 그들이 인간으로 치지 않았던 미국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WASP 바로 아래엔 프랑스나 독일계들이 있었고, 그 아래로 이태리계, 그 아래로 아이리시, 유태인, 흑인들과 라틴계가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리시 계들은 흑인들과 연합해 몇 번의 폭동을 통해 그들의 불만을 폭발시켰습니다. 미국의 지도층들이 가난한 아이리시계 백인 신참 이민자들의 불만을 삭이고 위해 흑인 농장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막기 위해서 도입한 것이 인종주의였습니다.
원래 미국 흑인의 역사는 노예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미국을 찾아온 라틴계나 아프리카의 자유 농장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되지요. 그러나 목화 플랜테이션이 시작되고 나서 일일이 이를 손으로 따고 가공해야 하는 목화 사업에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미국의 대농장주들은 영국 출신 노예상인들을 통해 노예를 공급받기 시작합니다.
초기엔 노예가 아닌 계약 노동자로 오게 된 경우도 많았고, 이들이 자기의 처우에 대해 불만을 품고 흑백이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백인 지배계층은 흑인들을 감독하는 위치에 아이리시들을 앉히고 그들 사이를 분열시켜 버립니다. 마치 정치적인 이유로 심어졌다가 지금 거의 불치병 수준으로 번져버린 우리나라의 지역주의처럼, 인종주의는 이때부터 독버섯처럼 자라나 미국의 중증 질환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계층을 만들어놓고 이 그룹을 대놓고 이지메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미국과 영국, 일본은 참으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배계층들도 '왕따의 대상'을 필요로 했고, 그들은 곡창인 호남의 민중들을 그 피해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앗긴다 하여 그들의 저항정신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었던 남도는 전두환의 비상계엄 조치에 체념하기보다는 분노를 택했고, 그것으로 인해 저들은 가장 먼저 빛고을을 짓눌러 다른 곳으로 번져가는 저항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맨 위에 이야기했던 아일랜드의 경우와는 비교될 수도 없는 엄청난 비극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5월이 신록의 아름다움이 아닌 핏빛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4.19 정신을 이어받은 광주의 민주화 항쟁은, 그 뒤로 한 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공식적인 민주화 운동으로서 인정받았습니다.
우리에게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 비극은 당연히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광주는 저들에 의해 다시 '부정되고 싶은 역사'로 돌아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광주는 해마다 5월이면 우리 역사에서 당연하고 마땅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바로 '민주주의'를 위해 숨져간 수많은 영령들의 한과 기억으로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이때 받은 상처가 아물기엔 아직 시간이 더 걸릴 듯 합니다. 아니, 그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그 화인 위에 다시 뜨거운 불을 지져대는 이 시대는 광주가 늘 '현재진행형'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것 같습니다.
5.18을 맞으면 꼭 떠오르는 분이 계십니다. 제게 민족의 평화통일과 조국의 민주화라는 명제에 눈을 틔워 주시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가셔서 고군분투하시다가 돌아가신 '광주 최후의 망명자', 합수 윤한봉 선배님의 웃음이 문득 떠오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