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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위(魏)나라 시대의 유명한 서예작품을 하나 소개드릴까 합니다.위(魏)나라 중신(重臣)이었던 종요(鍾繇)라는 사람이, 조조(曹操)가 관우(關羽)와의 樊城(번성)전투에서 승리(勝利)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된 하첩표(賀捷表)란 작품입니다.
서예사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해서(楷書)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글입니다.당시에는 예서체(隸書體)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종요(鍾繇)는 독특하게도 요즘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한자체인 해서체(楷書體)를 많이 써서 이를 완성시켰으며,후대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도 그의 글을 많이 임서(臨書)하는 등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대부분 이 글의 내용을, “촉(蜀)나라 장군인 관우(關羽)가 죽은 것은 위나라의 군사와 정치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승전(勝戰)의 희소식을 알리는 내용”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글 내용을 전체적으로 해설한 자료가 없어, 제가 해설을 시도하던 중 ‘관우(關羽)의 죽음’과 관련한 하나의 의문점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글 내용을 조금 소개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臣繇言戎路兼行履險冒寒臣以無任不獲扈從企佇懸情無有寧舍”
(臣 종요(鍾繇)가 말씀 드립니다. (太祖(曹操)께서는) 군대의 兵車와 밤낮으로 進軍하시어,험지를 마다 않으시고 추위를 무릅쓰고 계십니다. 그러나 臣은 맡은바 임무도 없이,폐하를 모시는 扈從(호종)의 임무를 득하지 못한바, (멀리서나마 승전(勝戰)의 소식을) 바라며 걱정하니,관사(官舍)에 머물러 있어도 편안할 수가 없나이다.)
그 다음, 번성(樊城)전투의 상세한 내용을 기술하고, 적장(敵將) 관우(關羽)에 대해서 기술한 후,승전(勝戰)의 기쁨을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表裏俱進應期剋捷馘滅凶逆 賊帥關羽 已被矢刃...奉聞嘉喜喜不自勝 望路載笑 踊躍逸豫 臣不勝欣慶 謹拜表因便宜上聞臣繇誠惶誠恐頓首頓首死罪死罪 建安廿四年閏月九日 南蕃東武亭侯臣繇上”
(...번성(樊城)안팎으로 공격하여, 적시(適時)에 승리를 거두시고 역도(逆徒)들을 궤멸하시니 적장(敵將) 관우도 패전(敗戰)한바(已被矢刃) 되었습니다....기쁨을 이길 수 없어,길을 바라보나니 들리는 게 웃음소리요, 전부다 좋아서 뛰며 마음 놓고 승전(勝戰)의 소식을 즐기니 臣 또한 기쁘고 경사로운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때마침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삼가 表를 지어 위에다 아룁니다. 臣 종요(鍾繇)가 황공(惶恐)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사죄드리며 올립니다.건안(建安) 24년 윤월9일(閏月九日) 남번동무정후(南蕃東武亭侯) 종요(鍾繇) 배상(拜上).)
이중 제가 의문을 가진 부분은, ‘賊帥關羽(적사관우) 已被矢刃(이피시인)’이란 구절인데,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적장 관우(關羽)도 화살(矢)과 칼날(刃),즉 병기(兵器)의 화(禍)를 당하게 되었습니다.”정도로 해석됩니다.
문제는 명확히 관우(關羽)가 죽었다는 표현이 아닌, 매우 애매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기존의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은 국내 및 일본에서 공히 “관우(關羽)가 죽었다”란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작은 의문이지만, 이 글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소홀히 할 수 없어서,이 글이 씌여진 날짜및 <三國志> 연표 상 번성(樊城)전투, 관우의 죽은 시기 등을 비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일단, 번성(樊城)전투 및 관우의 사망시기 등은 매우 명확히 다음과 같이 연표에 나와 있습니다.
219년 8월- 1차 번성(樊城)전투. 위(魏)나라 우금(于禁)의 軍이 한수범람에 수몰.관우(關羽)가 우금(于禁)을 잡고, 방덕(龐德)을 참수함. 태조(太祖: 조조), 서황(徐晃)을 파견.
219년 10월- 2차 번성(樊城)전투. 서황(徐晃)이 관우(關羽)군을 격파함.
219년 12월 관우(關羽), 漳鄕(장향)에서 오(吳)나라 장수 마충(馬忠)에게 사로잡혀 참수 당함.
220년 1월- 손권이 관우(關羽)의 수급을 태조(太祖: 조조)에게 보내옴.
220년 1월 23일- 태조(太祖: 조조), 낙양(洛陽)에서 서거(逝去)(향년 66세)
그러나 이 글이 쓰여 진 시기가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이 글의 말미에 적힌 날짜가 “건안(建安) 24년(AD 219) 윤월(閏月) 9일”로 기록되어 있어,윤월(閏月)이 도대체 몇월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음력(陰曆)의 윤월(閏月)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12달 중 어느 달 뒤에도 모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이 글의 윤월(閏月)이 당시 어느 달 뒤에 위치한 윤월(閏月)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삼국지>의 연표를 모두 뒤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윤월(閏月)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 없었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거의 자포자기에 이르렀을 무렵, <오서(吳書)> <여몽전(呂蒙傳)>에서 다행히 다음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19년 閏 10월 오(吳)나라 장수 여몽(呂蒙)이 공안과 강릉을 점령함.
즉, 당시의 윤월(閏月)은 10월 다음, 11월전에 위치하였고, 따라서 이 글은 2차 번성(樊城)전투 후,그러나 12월 관우(關羽)가 참수당하기 전에 쓰여 진 글임을 다행히 밝힐 수 있었습니다.
사소한 예이긴 하나, 한국 및 일본에서 잘못 알려져 있던 이 중요한 서예작품의 해설을 바로 잡는 의미가
있는 일인데다가, 개인적으로 몇 주간을 고생 고생했던 일이라 기억에 남아, 이렇게 소개드립니다.
<하태형/서예평론가/(주)소너지 대표이사/서울대 경영대 졸/ 경제학박사(뉴욕 주립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