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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해지자. 현재의 야권이 대선후보를 앞세워 내년 총선을 치러낼 수 있는가? 4·27 재보선을 계기로 야권 주자의 지지도가 박근혜 전 대표에 견줄 만큼 눈에 띄게 뛰어오를까? 한나라당의 분란과 이를 통한 어부지리를 기다리는가? 어쩌면 야권은 지지율 두 자리대의 대선주자를 하루속히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제1야당인(아직까지는) 민주당조차 자신의 강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지지율에서 더블, 아니 트리플 스코어 차이로 뒤지는 후보가 단일후보가 되었을 때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은, 민주당의 ‘셀링 포인트’가 인물이 아닌 정당일 수 있음을 뜻한다.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 격차는 8%로 좁혀졌다.(리얼미터 4월 11일 조사) 결국 민주당은 대선후보군의 지지도를 높여서 이에 편승하는 전략 대신, 정당과 정책을 중심으로 내년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김준석 동국대 교수가 지난 4월 24일(종이로는 다음날인 25일자)에 한겨레신문에 올린 칼럼의 핵심 요지다. 그의 논리를 현실정치권에서의 구체적 근거로써 뒷받침하려는 모양이었던지 사흘 후에 치러진 4ㆍ27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손학규 씨와 최문순 씨는 애당초 고전이 예상되던 분당 신도시와 강원도에서 각각 승리를 거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권연합의 간판을 내걸고 출사표를 던진 국민참여당의 이봉수 씨, 정확히는 국참당 대표 유시민 씨는 저들이 ‘성지’로 우러러온 김해에서 한나라당 후보자 김태호 씨에게 역전패하고 말았다.
여담도 있다. 사실상의 민주당 후보인 조순용 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김경재 씨를 따라서 민주노동당 김선동 후보를 상대로 어설프게 색깔론을 제기했다가 생일도 아닐 날에 미역국을 마셔야 했다. 나는 조순용 씨가 민주당 성향 후보들 단일화한답시고 김경재 씨와 말만 섞지 않았어도 국참당에 버금가는 추악하고 파렴치한 치킨게임을 자행한 민노당 당적의 경쟁자에게 그렇게 큰 차이로 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재보선이 치러진 지 보름가량이 가까이 지난 오늘, 민주당의 정당지지율이 한나라당의 그것을 앞질렀다는 여론조사결과 소식이 전해진다. 현재 같은 민심의 흐름이 내년의 총선과 대선 시기까지 무한정 지속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한나라당이 새로운 당대표를 선출하고, 박근혜 씨가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면 한나라당의 정당지지도는 민주당의 정당지지율을 쉽사리 추월할 전망이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노무현 정권 중반기부터 국민들이 지겹도록 보아온 1 : 2 내지 1 : 3 같은 정당지지율의 일방적 차이는 웬만하면 재연되지 않으리란 점이다.
나는 김준석 교수의 칼럼을 읽고 조금 과장 보태서 너무 감동한 나머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김 교수의 논지가 특별히 진보적이어서도, 대단히 수준이 높아서도 아니다. 그의 글은 지극히 정상적인 내용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조국과 오연호가 아무리 진보적 소리를 해대면 뭐하나. 둘 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걸. 한홍구와 서해성이 모여앉아 어마어마하게 수준 높은 담론을 펼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둘 다 어딘가 맛이 간 걸.
한니발이 전인미답의 알프스를 넘어와 로마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불세출의 영웅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허나 한니발이 활약한 지 오래지 않아 그의 조국 카르타고가 로마에 의해 멸망한 일 또한 사실이다. 아니, 단순히 나라가 망한 것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로마병사들은 17일 동안이나 불길에 휩싸여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버린 카르타고의 폐허 구석구석을 쟁기로 갈은 다음에, 그 위에다가 소금까지 뿌렸다고 한다. 화려한 번영을 일군 카르타고 제국의 옛 땅에서 다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끔 하려는 뜻이었다.
문제는 카르타고의 멸망이 진즉에 예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저주받은 숙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카르타고 백성들이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현대도 그렇지만 고대는 그야말로 인구가 국력인 시대였다. 그 때문인지 언제나 로마의 제1과제는 인구로 상징되는 국력의 증대였다. 로마의 역사가 끊임없는 M&A, 즉 인수합병의 역사인 까닭이다.
로마와는 다르게 카르타고는 연합에 의존했다. 연합의 수단이 돼준 지렛대는 무역으로 거둬들인 황금이었다. 그들의 황금은 자기 나라의 인구를 불리는 대신에 용병들의 배를 불리는 데 쓰였다. 시쳇말로 통합과 연대의 정신에 지나치게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로마군의 주력은 늘 로마시민이었고, 카르타고 군대의 대다수는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을 이민족 출신 용병들이 차지했다. 민주당의 금맥이라고 할 호남은 무엇을 늘리고 불리는 데 쓰이는지 한번쯤 자문해볼 노릇이다. 호남민중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키며 성사된 야당연합은 이탈리아에서의 한니발의 승전보처럼 큰 화를 부르는 데 필요한 작은 복에 불과하다.
그게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한니발이 알프스산맥 횡단도 결국은 고육지책의 산물이었다. 정상적인 게임의 법칙은 아니었던 셈이다. ‘작전의 신’들과 ‘전술의 귀재’들이 발호하면 할수록 그 나라나 조직은 망조가 들었다는 역설적 증거로 해석해야 진실에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비근한 예로 노무현 정권만 해도 노 전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그 얼마나 많은 ‘정치천재’들이 득세했는가? 그 수많은 정치천재들 중에서 단 한 명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막지 못했음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천재 많기로는 과거의 독일군과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군도 참여정부 부럽지 않은 처지였다. 그래서 양국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던가? 무수한 전략의 천재들을 배출한 독일은 나라가 두 동강 났고, 대본영 안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작전의 신들이 수두룩했던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방을 얻어맞고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야만 했다.
포에니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제일 중요했던 싸움은 메타우로 강 전투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한니발의 친동생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형과 상당히 엽기적으로 재회해야 했다. 보자기 속에 싸인 베어진 수급으로. 후세의 사가들에 의하면 하스드루발은 한니발보다도 더 크고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서 알프스를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군대는 로마군한테 맥없이 전멸을 당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한 번 써먹었던 작전을 눈치 없이 또다시 써먹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한니발 때와는 달리 이미 충분한 대비를 갖추고서 하수드루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의 대군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국력을 키우기보다는 기기묘묘한 작전 개발에만 더욱 열중한 나라의 장수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운명은 한니발의 용맹한 아우마저 비껴가지 않았다. 이 대목을 읽은 사람은 분당을과 같은 적진의 텃밭을 기습적으로 침투해 거기에서 당선됨으로써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일에 성공하는 사례는 한국정치에서 아마도 손학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임을 힘들지 않게 유추할 수 있으리라.
내가 손학규를 한니발에 비유한 것을 어떤 사람들은 그에 대한 맹목적 칭찬으로 받아들인 눈치다. 그게 칭찬이 될지 욕이 될지는 오롯이 손학규 본인 하기에 달려 있다. 알프스 여행에 맛을 들였다가 오히려 본토가 로마인에게 속된 말로 ‘역관광’당한 한니발 형제의 전철을 밟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주당의 당력을 키우는 데 매진하고 집중하는 거다. 적이 예측하지 못한 곳을 공격해 들어가 승리를 쟁취한다는 의미의 ‘攻其無備(공기무비) 出其不意(출기불의)’론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언정 전쟁에서는 승리하기 어렵다.
기억하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앞서서 영입한 인재들은 국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는 문신형의 경세가들이 주류였음을. 그들이 충실히 배양한 국력이 전제된 상황에 이르러서야 이런저런 무장들과 책사들이 전쟁터에서 자기들의 솜씨를 뽐낼 수 있었다. 그뿐인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후방에서 백성들을 살찌우고 군비를 대준 소하를 최고의 개국공신으로 꼽았다. 현란하기 짝이 없는 전략전술들을 자유롭게 구사해가면서 최전선에서 적병을 무찌른 한신의 공적은 낮게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