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모두 위대하다
그리고, 위대한 인물들 뒤에는 잘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다. 백제를 낳은 비류와 온조를 낳아 기른 소서노와 더불어 해민족사의 위대한 어머니상이 바로 KOREA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어머니 유화다.
만주지역은 요하.흑룡강.송화강을 중심으로 수 많은 강줄기들이 많다.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찌든 자들이 넘쳐 나는 강단사학에서는 위서로 취급받는 탓에 그 진가를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혀 주고 있는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유화는 지금의 요하을 따라 해상무역을 하던 하백의 딸이였다. 지금의 요하를 고대에는 서압록강이라 불렀다.
기자조선(번조선) 말기에 연나라 장수 위만이 난하를 건너 번조선(기자조선)에 망명하여 난하지역에서 경계을 담당하는 박사로 임명받았으나,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한나라가 쳐 들어 왔으니 기준을 지키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기자조선의 수도로 쳐 들와 권력을 쟁탈하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기준세력은 무리를 이끌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마한=마조선)지역으로 들어와 마한세력을 격파하고 마한 왕검성(북한 평양)에서 '한왕'으로 즉위하였다가 다시 토착마한세력에게 밀려나 남쪽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의 상장군 '탁'의 고향이라는 직산에서 나라를 세우니 중마한이다. 기자조선세력은 단군조선의 3한 통치제도를 모방하여 다시 중마한을 중앙국가로 번.진한을 구성하니 남한지역의 마한3연방이다.
서압록강(요하)은 위만조선과 부여의 국경지역이였다. 위만조선은 자꾸 부여를 공격해 왔다. 이 때 위만조선의 침략을 물리친 공로로 옥저왕에 봉해진 인물이 바로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 불리지다. '고모수'라고 불리우는 이 불리지가 바로 고추모의 아버지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비문에 고추모를 북부여에서 나온 '천제지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배경이다.
해모수의 손자되는 해부루가 부여 단군으로 즉위한지 8년되는 기원전 79년 고모수(불리지)가 서압록강을 순행하다가 미모의 유화를 발견하고 교우하여 유화가 고추모를 임신하게 되었다. 고추모가 태어난 날이 바로 어린이날이 되는 5월 5일이다. 참고로 석가탄신일인 4월 8일은 고추모의 할아버지 해모수가 부여를 세우신 날이다.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을 우리 선조들이 정할 때는 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고추모처럼 건강하고 담대하게 자라 큰 인물들이 되라는 의미에서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정했을 것이고,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단군임금 고열가가 더 이상 덕치가 통하지 않음을 한탄하시고 단군조선의 문을 닫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림으로써 5가의 부족장들이 모여 공화정으로 6개월간 나라를 다스릴 때 해처럼 등장하여 아수라장같은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고 부여을 세운 인물이 고열가 단군과 친척이 되는 해모수인데, 해모수처럼 아수라장같은 세상을 용맹함과 대자대비로 수습하고 해탈하여 극락으로 만들자는 의미에서 석가탄신일로 정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해모수자태는 용맹하여 빛났으며,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하늘에서 내려 온 왕(천왕랑)이라 할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배경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고추모을 출산한 후에도 아버지 고모수는 유화를 찾아 오지 않았다. 유화는 고추모를 데리고 불리지를 찾아 갔으나, 이미 불리지는 죽고 없었다. 어린 아이 고추모를 데리고 유화는 해모수가 부여을 일으키고 고모수의 친척들이 있는 웅심산 지역(길림)으로 가서 살기도 하였으나, 당시 부여상황은 해모수 왕조에서 고두막 왕조로 권력이 바뀐 상황이였다. 즉, 한나라가 자꾸 부여을 침략하게 되었는데 해모수 왕조가 무기력하게 대응하자, 흑룡강지역 고리국에서 부여로 망명한 고리국왕의 아들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민심을 얻어 부여권력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민심이 고두막에게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돌아 서게 되니 해모수 세력은 고두막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했다. 고대나 지금이나 백성은 강하면서 백성의 마음을 알아 주는 인물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사실을 잘 증명해 준다. 그래서 무기력한 인물들은 결코 통치자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해모수의 손자 해부루가 고두막의 제후가 되겠다며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니 가섭원부여다. 연해주지역을 가섭원이라 불리여서 그런 나라이름이 된 것이고, 우리 역사에서는 동부여로 알려진 나라다. 그러나, 아직도 부여와 동부여를 구분못하고 동일시하는 논리를 펴고 사학자들이 많다. 동부여는 부여(북부여)의 제후국가다. 동부여왕 해부루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금와를 양아들로 삼았다.
유화는 고추모를 데리고 해부루를 따라 동부여로 이주했다. 해부루가 동부여 왕궁에서 친척되는 유화를 잘 보살폈던 모양이다. 동부여 금와왕도 아버지 해부루의 유언을 따라 유화를 잘 보살폈고 후비로 삼았던 것 같다. 가섭원으로 이주했을 때는 고추모는 20대가 되었고, 동부여의 말들을 관리하는 관리로 일했던 모양이다. 유목.수렵국가에서 기마군대로 직결되는 말은 최고의 국가재산이다. 따라서 고대에 말들을 관리하는 관리는 아무나 임명하지 못했다.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열도로 건너간 아직기가 일본왕실의 일본에서 말들을 관리하는 말지기 관리을 했던 이유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는 금와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왕이 되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해모수의 손자이며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왕의 친척이 되는 고추모가 매우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고추모에게로 민심이 돌아 서서 자신의 권력을 잃으면 어찌할까 고심했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고추모를 죽일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사실을 정보입수를 통해서 알게 된 유화가 평소가 매우 잘 달린 말을 골라 주면서 고추모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이 때 고추모를 따랐던 오이.마이.협보와 함께 말을 달렸으나 엄리대수(송화강)에서 막히게 된다. 뒤에는 자신들을 죽이려는 금와왕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다. 이 때 고추모가 큰 소리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병사들이 추격해 오니 어찌 하면 좋다는 말인가!"라며 탄식할 때 수 많은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 올라 길을 만들어 주어 무사히 건넜다는 전설이 송화강에는 전해 오고 있다. 동명왕 고두막이권력암투에 휘말려 자신이 죽임을 당하려 하자 흑룡강지역 고리국을 떠나 송화강을 건넜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 올라 길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고추모를 높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신화적 기법이 사실은 얼어 붙었으니 봄이 오면서 녹는 송화강 얼음판을 구사일생으로 건넌 상황을 그렇게 포장해서 표현했는지 모른다.
자신을 죽이려는 동부여 대소왕자세력을 피하여 부여로 망명직전에 동부여에서 혼인도 하여 아들(훗날 고구려 2대 태왕 유리)까지 가진 유부남이였던 고추모가 부여로 망명해 왔을 때 나이는 22세였다. 당시 부여 단군은 우리역사에서 동명왕이라 불리우는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였다. 그러나 고무서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