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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세 차례에 걸쳐 10년 거주하면서 나는 각계각층의 많은 프랑스인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 가지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을 이해 타산과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들,인종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진정한 배려와 사랑으로 남다른 감동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문화 정책과 예술 행정에 큰 족적을 남긴 故 Bernard Anthonioz씨<사진/1921-1994>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그를 기리고자 하는 것은 그의 문화 관료로서의 뛰어난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그것 보다는 나는 그에게서 성자(聖者)에 가까운 인품을 느꼈기 때문이다.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씨는 드골 정부 시절 앙드레 말로 문화장관의 막료로 문화성 예술 창작 국장(directeur de la création artistique)을 역임한다.
그는 장장 11년간을 이 자리에 재임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현 조형예술 지원 정책의 초석을 놓았으며,또 국립 현대 미술관 (le Centre national d’art contemporain)Zao Wou-ki 등 역량 있는 작가의 발굴 지원에도 앞장 섰다.
또 1969년 문화성으로부터 퇴임한 후에는 파리 및 지방의 예술 기관 및 예술가들의 지원에 여생을 바쳤다. 그는 많은 재불 한국 미술인들에게도 고마운 후원자로 기억되고 있다.파리 근교 Nogent-sur-Marne에는 프랑스 정부 출연으로 건립된 그를 기념하는 “Bernard Anthonioz 예술의 집” (La Maison d’art Bernard Anthonioz)이 있다.
내가 앙또니오즈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으로 기억한다.당시 나는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문화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앙또니오즈 씨는 당시 문화원장이 접촉하던 프랑스 문화계의 주요 인사였기 때문에 문화원장을 보좌하는 나로서는 그의 명성만 들어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문화원장에게 전화를 했다가 비서로부터 휴가 중이란 얘기를 듣고 나를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었다.그러더니 업무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철인데 바캉스는 안 가냐고 물어 보는데 퍽 자상한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그 후 그를 문화원장과 함께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높은 명성에 비해서는 자그마한 체구에 나직한 음성의 무척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분 인품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것은 얼마 후 한국 식당에서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어느 날 그 당시 파리에서 제일 좋다는 한식당 ‘Le Séoul’에서 그와 함께 오찬을 할 기회가 있었다. 나 외에도 한국인 참석자가 또 있었는데 누구였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식당은 ‘고급 식당’이라 보통은 블랙 타이를 한 프랑스인 웨이터들이 서브를 하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많았던지 카운터를 보던 한국인 여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 종업원이 서투른 탓인지 앙또니오즈 씨가 주문한 육개장을 들고 와 그 뜨거운 국그릇을 그의 등에다 통째로 엎어 버린 것이다.
다행이 그는 통상 서양 남자들이 식당에서 하듯이 양복 상의를 벗지 않은 상태였다.그의 자켓은 엉망이 되었고 동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당황했다.그런데 정작 날벼락을 맞은 앙또니오즈 씨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여 종업원을 위로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움과 함께 앙또니오즈 씨에 대해 한없는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그가 이 때 보여준 처신은 나에게는 거의 성자의 행동처럼 느껴졌다.그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오찬을 예정대로 다 마치고 그의 자켓을 세탁해 주겠다는 식당에 맞긴 채로 음식점을 나섰다.
나는 그 후 그를 생각할 때 마다 그 때 그가 보여준 인간적인 품위를 잊을 수가 없다.그의 서거 이년 후인 1996년 파리 한국문화원에서는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추모전’이 열렸다. 이 전시 개막식에는 같은 레지스탕스 출신이며 드골 전 대통령의 조카인 그의 미망인 Geneviève de Gaulle-Anthonioz 여사와 고인을 추모하는 한불 양국의 많은 예술인들이 참가했다.
특기할 일은 이날 행사에는 앙또니오즈 씨 내외와 교분이 있던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이 직접 참석을 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현직 프랑스 대통령의 한국 문화원 행사 참석은 이례적인 일로 무엇보다도 현대 프랑스 예술 행정에 큰 족적을 남긴 고인에 대한 경의의 표시겠지만 또한 프랑스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박애 정신을 평생 실천한 한 의인에 대한 homage (佛 hommage)로도 느껴졌다.
<손우현/한림대 초빙교수/서울평화상문화재단 사무총장 역임/주불(駐佛)공사 겸 파리문화원장, 청와대 해외공보비서관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