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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0월 1일은 우리에게는 '국군의 날'이지만, 중국에게는 '건국 6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이날 우리의 국군의 날 행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대규모 군사퍼레이드가 펼쳐졌습니다.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20만명이 참가하는 군사 열병식과, 군중 퍼레이드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축행사와, 다양한 기념행사를 통해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한 모습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하루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예전에 중국 하면 '도광양회(韜光養晦)'와 '흑묘백묘(黑猫白猫)'라는 2개의 단어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감출 도(韜), 빛 광(光), 기를 양(養), 그믐 회(晦). 빛을 감춰 외부에 비치지 않도록 한 뒤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으로, 1980년대부터 개혁개방정책의 기조로 삼은 단어이지요. '흑묘백묘'(黑猫白猫)는 등소평이 택한 개방경제정책으로 고양이가 희건 검건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국민을 잘 살게 하면 뭐든지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 '흑묘백묘'는 사라지고 '녹묘(綠猫 : 녹색고양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려옵니다. 인민이 잘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환경오염 업종이든 노동집약 업종이든 가리지 않던 중국이, 몇 년 전부터 깨끗하고 세련된 '녹색고양이'로 상징되는 첨단산업과 친환경산업만 받아주겠는 정책으로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요즘에 더 자주 들리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바로 ‘허셰'(和諧 : 조화)입니다. 중국 건국 60주년의 공식 구호이기도 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공연의 주제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예산의 투입과 치밀한 준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세계적 연출가인 장이머우와 1만 명이 넘는 출연자와 스태프들이 수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베이징올림픽 개막공연을 본 현장의 관객이나 전세계의 시청자들은 장엄하고 화려한 중국 문화의 진수에 감탄하며 놀라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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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는 그 공연을 보는 내내 불편한 심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장엄, 화려, 최첨단 영상으로 포장된 공연에서 국민통합을 통해 ‘대국으로 우뚝 서려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소수민족 복장을 입은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오성홍기’를 받쳐 들고 걸어가서 ‘인민해방군’에 건네주는 장면은 독립과 분열 행위를 그만두고 국민 모두의 운명을 국가에 맡기자는 중국 정부의 전체주의적 의지가 여과 없이 읽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사회 통합을 위해 중화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태우려 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중화주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 정부가 택한 것은 신화, 역사, 공자 사상, 전통예술 등 문화입니다. 하상주 단대공정, 중화문명 탐원 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동남공정, 동북공정 등의 대규모 국가적 프로젝트는 중화 민족주의의 정립을 위해 문화를 총동원하고 있는 사례들입니다.
그러나 경제개방 이후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실업자 양산, 부패로 인한 공직사회 불신, 지난해 발생한 티베트 유혈시위사태와,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유혈사태를 통해서 나타난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족의 분리독립 움직임, ‘주사기테러'에 대한 우루무치 한족들의 대규모 시위 등으로 ‘하나의 중국'과 ‘민족대단결'이라는 ‘허셰사회론'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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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과정에서 벌어졌던 중국인들의 서울 한복판에서의 폭력사태는 우리에게 큰 걱정을 안겨 주었지요.
걱정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주요 외신들도 중국의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우려하는 기사를 보도했지요.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기 얼마 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중국의 민족주의는 불타고 있는 정도를 넘어 증오와 적의마저 품고 있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영국의 유력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5월 3일자에는 표지에 '성난 중국(Angry China)'이라는 제목과 함께 붉은 용의 머리가 그려져 발간되었습니다.
갈수록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중국 민족주의는 인터넷에서도 뜨겁게 불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네티즌들이 '우마오(五毛)'와 '왕터(網特)'로 나뉘어 인터넷을 달구고 있습니다. 우마오는 정부를 대변하는데, 글 한편을 올릴 때마다 5마오(약 한화 70원)를 받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반대로 왕터는 '인터넷 특무'라는 뜻으로 중국의 재야 운동권입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옹호하고 중국 정부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많은 중국의 네티즌들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우마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하네요.
베이징올림픽과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서 보듯 중국정부는 자국의 경제적 성과와 정치적 이념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고, 중화문명의 찬란한 영광과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알리려고 국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거창하게 치러졌던 건국60주년 행사는 현대 중국의 정치적 이념을 구현한 거대한 선전물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국가가 주최하는 체육행사나 국가적 행사에서 문화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를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진정한 의미의 ‘조화’와 ‘어울림’과 ‘화합’의 지혜입니다.
문화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속에 모든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세계, 하나하나의 꿈’을 공존시키는 매개체로서 작용해야 합니다.
문화가 민족주의, 제국주의, 애국주의, 전체주의 세계관과 섞이게 될 때, 그 문화는 다른 민족의 정신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김명곤/전 문화관광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