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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첫날에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던 까닭인지, 시간이 벌써 5월이라는 것, 그것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날씨의 탓도 큽니다. 아직도 아침 저녁으로는 재킷을 꺼내 입어야 하는 쌀쌀함이 참 오래도록 시애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처럼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는 시애틀의 봄 동안, 저는 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광경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벚꽃은 조금 피는가 싶더니 그대로 비를 맞아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신 여느 해보다 두텁게 피어난 겹벚꽃은 이제서 화사한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열흘간 휴가를 갖고 나서, 오랫만에 다시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잠깐 인터넷 카페에 들르니 제대로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 보니 5월도 어느새 '어린이 날'이군요.
이곳도 스승의 날, 어머니날이 5월인 건 마찬가지여서 그런지(하지만 '아버지 날'이 6월에 따로 있습니다), 작은아들 지원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께 꽃을 갖다 줘야 한다고 해서 어제 저녁엔 아내가 허겁지겁 코스트코로 꽃 사러 뛰기도 했다는군요. 그립고 감사할 대상이 많은 계절, 그리고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5월의 모습은 평소보다 서늘한 날씨 때문인지 그렇게 화사한 여왕의 모습은 아닌 듯 합니다.
다시 맞은 오월, 참 우리에겐 사연도 많습니다. 남도의 오월은 핏빛 슬픔이 민주주의의 꽃으로 승화되는가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오월의 색깔이 봄꽃의 화사함이 아니라 이젠 '노란색'으로 추억되어야 하는 슬픔도, 아직 채 가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 극단들 안에서 아둥바둥대면서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반도에 사는 이들의 운명, 그것도 '분단된 반도'에 사는 이들의 운명일까요.
원래 반도국은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곳. 과거 로마제국처럼 그 스스로가 강성하여 대륙과 해양 세력을 모두 아우르며 다스릴 수 있는 강국이 되지 않는다면 늘 주변국의 사이에서 끼어 다치게 됩니다. 발칸 반도가 그랬고, 크림 반도가 그랬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옛날 대륙을 아우르던 고구려의 시절부터 우리의 핏속에 내재되어 있던 대륙의 호기가 신라 이후, 그리고 일제 시대때 완전히 축소되고 그나마 그것이 남북으로 반동강나고서부터 우리에게 그 대륙의 기질은 사라지고 섬나라보다 더 섬나라같은, 소인배의 좁은 마음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가 문득 듭니다.
그것에서 물론 저도 자유롭지 못했고, 여기서 20년 이상을 보낸 다음에 돌이켜보니 이제서 조금 내 주위를 포용할 줄 아는 자세를 기르게 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여기서 오래 산 사람들도 '한인사회'라는 섬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선 그 변화를 보기 힘들다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4월, 5월, 6월... 우리에게 봄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그 어느 달도, 순전히 아름다운 봄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고 가꾸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직 풀리지 못한 슬픔들과, 새로이 쌓이는 슬픔들이 켜켜이 이끼나 녹처럼 우리의 진취적인 면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더 좀먹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의 봄을 다시 화사한 것으로, 찬란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속좁음 따위는 털어 버리고 우리 유전자 안에 내재되어 있을 그 옛날 강성했던 시절의 대륙적 기질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역사가 진정 새로이 환하게 꽃피어날 수 있도록.
아직도 조금은 쌀쌀합니다. 정말 다시 봄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군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