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해전사의 영웅 이순신을 고작 100원짜리 인물로 만든 '빠가야로 조센징들'
독도영유권 내세우는 일본에게는 분노하는 한국민들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당시 세계최고의 조총을 무기로 조선을 삼키고 지나대륙을 삼키고 유럽까지 정벌하겠다는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야욕을 앞세운 일본을 바다에서 전멸시켜 버린 세계 해전사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고작 100원짜리 동전에다 박아 넣고 아이들 '짤짤이' 도구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빠가야로 조센징들이란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돈 받고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일본장교 박정희를 우상화하고 박정희 딸 박근혜를 몰표로 대통령 만들어 주겠다는 영남이야말로 최고의 빠가야로 똥물 조센징들인 셈이다. 또한 민주당을 호남지역당으로 매도하며 김대중하야를 요구하고 민주당깨지는 일이 대한민국 정치에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나불댔고 "호남이 나 좋아서 찍었겠냐 이회창 좋아서 찍었겠지"라던 노무현의 배은망덕한 호남비하에 대하여 맞짱구를 쳐 주며 호남이 노무현을 밀어 준 것은 한나라당을 저지할 양자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나불대던 유시민같은 양아치 영패주의자와 연대를 운운하는 자들도 정말 '빠가야로 조센징'에 불과하다 하겠다.
선조와 조선조정을 움직여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의 전술은 적중하여 결국 이순신은 일본의 거짓첩보에 속아 넘어간 선조의 부산포공격명령 불복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는 바람에 이순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경상우수사 원균의 조선수군을 지휘함으로써 결국 조선수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대참패하여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함선들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조선수군이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자멸하느냐 승리하느냐가 달린다는 사실을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수군같은 민주당이 깨지는 것이 영광이라는 유시민같은 자들이야말로 원균같은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은 그러한 원균을 경멸하고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 욕심을 위해서 원균같은 유시민과 짝짝궁이 되겠다는 자들이야 말로 반이순신 세력이라 할 것이다.
고로 10만원짜리 앞 뒤면은 해민족의 뿌리조상인 마고와 환인.환웅.환검을 올리고, 5만원짜리 앞뒤면은 해민족의 상무정신을 드높인 치우천황과 광개토태왕을 올리고 1만원 짜리 앞뒤면은 애국애족애민의 상징 세종 임금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올려야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우리 해민족사에 최고의 성웅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왕과 신하들이 시기질투를 하고 신뢰하지 않고 끌어 내리려는 악조건 속에서도 절망과 병이 짖누르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유비무환으로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여 조선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순신과 함께 했던 호남 참모들과 호남민중들은 더 위대하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침략을 통하여 수탈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와 외세에 굴종하는 사대주의는 거부되야 하며 인류평화를 위해 사라져야 한다. 자신의 출세와 영화를 위하여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맹세를 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헌신한 박정희 따위가 불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권력유지에 수단화했다는 점에 분개하면서 주변외세에 의존하는 남북한의 사이비 권력들이 민족의 영웅들을 권력유지에 악용하는 짓거리는 천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완도 고금도 충무사 충무공 영정
조.일 전쟁당시 조선3도 수군통제사령부는 서해와 남해의 교차로가 되는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있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충남 아산으로 이장되기 전에 안치된 곳이 고금도다. 원칙주의자 이순신을 빛나게 한 건 참모들인데, 전라좌수사 시절 거북선을 제작한 나주출신의 나대용을 비롯하여 항로와 전투에 뛰어난 호남출신의 참모들과 호남민중들의 협력때문이었다. 지도자가 빛나려면 참모들이 뛰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도 약산도에서 강진으로 빠져나올 때 거치게 되는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섬이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 수군본영을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이 중요한 것은 완도에서 가장 많은 농지를 갖춘 섬이기 때문이다. 군대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갯벌이 발달해 소금을 만드는 일도 가능했다. 예로부터 고금도에서 생산되는 쌀은 완도 일대에서 많이 소비됐다.
▲전남 완도 고금도 고지도(1872년).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사령부였던 덕동(아래 왼쪽)과 지금의 충무사가 있는 묘당도(오른쪽)가 자세하게 그려 졌다
충무공이 완도 고금도 덕동에 조선수군본영(총사령부)을 구축한 것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듬해(1598)였다. 때문에 지금도 덕동(조.일 전쟁당시는 묘당도라는 섬이였다)에는 충무리라는 마을과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무사가 있다. 사당 앞에는 충무공 사후 처음으로 모셨다는 가묘가 있다.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고 전사한 충무공을 아산 선영으로 모시기 전 80일간 안장한 곳이라고 전한다.
▲ 충무공의 고향인 아산으로 이장되기 전에 80여일 간 묻힌 고금도 이충무공 가묘터
홍순승 충남도교육청 장학관은 16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펴낸 이순신연구논총에서 "이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고금도(전남 완도)에 안치되었다가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돼 다음 해 2월 11일 금성산에 안장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84일만에 장례가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三月而葬)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며 첫 묘자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참모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잡았다.
이 충무공은 사후 새롭게 평가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며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은 첫 장례가 전란 직후 예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고 조정에 이장을 상소, 첫 장례가 이뤄진지 16년후인 1614년 일등공신에 걸맞은 크기와 이장절차를 거쳐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
근대에 이르러 이 충무공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더욱 활발해져 1908년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성웅(聖雄)' 칭호가 붙여진데 이어 충무공 이순신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활용한 제3공화국 시절 역사상 최고조의 평가에 오르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곡장)이 처지고 홍살문이 세워지는 등 왕가의 무덤(園) 수준에 이르게 된다.
호남이 국가라고 말한 충무공 이순신과 호남없이는 일본침략 앞에 조선은 유지될 수 없었다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한창일때 이순신을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하여 옥에 2차례나 가두기도 하고, 한산대첩, 명랑대첩을 이끌어 냈을때도 이순신에게 상을 내리기는 커녕, 이순신의 활약을 과소평가하기도 했다.
아직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