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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지내다 보면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들이, 아주 잠시만 머무르면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을 하다가 정차하고 있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면 요즈음은 옹벽에 내려뜨려진 개나리 줄기가 자그마한 노란 싹을 틔우고 있다(이 글이 나갈 때쯤에는 개나리는 활짝 피고 지고 할 것이다).
내가 출근하는 노선에서 멀리 바라보면 북한산이 먼저 보이고, 남산, 인왕산, 북악산, 관악산, 그리고 우면산의 봉우리들을 별견(瞥見)하면서 지나갈 수 있다. 의연한 자세로 아침 햇빛을 봉우리부터 맞이하고 있다. 내 자신이 지방 출장을 갈 때에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적당한 곳에 멈추어 5분 내지 10분이라도 거닐다가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아도 그와 같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 않았다.
요즈음 서울 근교의 아름다운 처소를 지나가다가 강가의 조그만 소공원의 나무의자에 앉아 있으면 아직은 땅바닥에 기는 듯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지난겨울에 춥고 배고파 웅크리고 지내던 작은 새들이 명랑하게 지저귀는 소리도 듣게 된다. 마음 가볍고 가슴 뿌듯한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박새일 것이다. 작은 나뭇가지에도 이리저리 오종종 건너 뛰어 다니고 마른 갈대 속에서도 버석거리는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작은 새들이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는 우리들의 학창시절에 그 내용에 반하기도 하고, 영어공부도 할 겸 여러 차례 읽었던 책이다. 주인공은 모국 영국에서 의사로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인생을 버리고 여행지 아프리카에 머무르고 만다. 그의 머무름은 늘 나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울지마 톤즈>로 소개되었고, 아프리카의 남수단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던 이태석 신부의 머무름에 대하여 어떤 묵시록 같은 이끌림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도상에서 머무를 줄 아는 분이었다. 어렸을 적에 오후 대여섯 시쯤 성당에 가서 진노랑 오후 햇살이 내려앉은 곳에 놓여 있는 풍금 앞에 머물러 연습할 줄 알았고, 인제대학교 의과대학과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일반사회에서 의사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가톨릭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로마에 유학하여 마침내 사제서품을 받은 후 한국에 머물러 신부로 활동하지 않고,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향하였다.
내전과 기초적 질병이 있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머무르기 위하여 그곳으로 떠났다. 장학금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삯바느질 등을 하면서 등록금을 대주시던 10남매의 어머니의 소망을 애절하게 뿌리치고, 나아가 사제서품을 받고서 저 멀리 아프리카로 떠나버리는 매정한 결단은 어떻게 하여서 내려지는 것일까.
이 신부에게 그것은 결단도 아니요 소명도 아니었다. 그는 자원봉사자로 그곳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두 가지를 보았다. 그 중의 하나는 너무도 많아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과 손만 대면 금방 톡하고 터질 것 같은 투명하고 순수한 그곳 아이들의 눈망울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뿜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으며, 후에 선교생활을 하면서 그곳 한센 병 환자들에게서도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에서 삶의 향기를 느꼈다. 그는 인생의 아름다운 향기가 있는 곳에 머물고자 하는 강력하고 분명한 이끌림과 천연덕한 자연스러움으로 멀리 그곳에 가서 머무른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는 평범한 신부요, 의사였을지 모르나, 이역(異域) 수단에서 사도에 버금하는 행전(行傳)을 엮어 나갔다.
내가 7, 8년 전부터 인연을 맺고 드나드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그분이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2개월간 머무르던 성 프란치스꼬회의 콜베 수도원이 있다. 그분이 거기 계신 줄도 몰랐다가 사후에 찾아가 보았다. 그분이 몇 사람과 함께 기거하던 방의 단촐 함, 그리고 그분처럼 항암치료를 받던 두 자매와 함께 활짝 웃으시면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벽에 달랑 붙어 있었다. 그분이 촛불처럼 타오르리라를 열창하던 쉼터의 앞으로 고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격변하는 세상에서 변화의 선두에 서지 않으면 존재감을 상실하는 듯한 위기의식에 둘러싸여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분처럼 삶의 향기를 좇아가는 위치에 머물러 주변을 돌아보면 어떤 두려움이나 절박함 앞에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평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부여받은 소중한 영혼이란 어떠한 것인지 저절로 밝혀지는 것들이 있다. 바쁜 중에도 새삼스럽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찬란한 광채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한다.
그분은 자신의 머무름 가운데, 멀리 떨어진 한국과 남수단 사이에 사랑의 마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세계사를 쓰기도 하고 그 너머에 인간 영혼의 우주사를 기록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눈물짓는 모친을 뒤로하고, 자신의 목숨이 스러져 가는 것도 잠잠히 순명(順命)하신 모습에서 더욱 그러하다.
<박연철/변호사/법무법인 '정평'대표변호사>